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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함석헌 > 씨알의소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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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역 사
1991.04

"씨알의소리" 가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에 의해 1991.4월호부터 휴간. 1994.11 - 1998 12 "씨알마당"이란
제1호로 '함석헌 기념사업회' 회원지 형식으로 "씨알의소리"를 대신하여 발행하다.

1990.03.26 본지 정기독자 2천명 돌파되다.(정기독자총수 2157명)
1990.03.07 3월호 3천5백부 발행.
1990.02.04 씨알 함석헌 선생님 1주기 추도식 거행하다(장소:한신대학원강당 500여 조문객참석)
1990.02.03 2월호 3천부 발행.
1989.12.29 윤영헌 님 사임.
1989.12.28 90년 신년호부터 정기독자 위주로 계획을 바꾸어 3천부 발행하다.
1989.12.15 회현동 2가 사무실을 마감하고 도봉구 쌍문 2동 81-78 함선생님 자택 1층 사무실로 이사하다.
1989.12.02 복간 1주년 기념강연회 열다.
(강사: 김동길- 씨알의 나아갈길/ 송건호- 한국 언론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장소- 여전도회관)
1989.11.23 11. 12월 합본호 4천부 발행
1989.10.06 10월호 5천5백부 발행.
1989.09.11 한해수 님 사임으로 윤영헌 님(업무책임) 기용하다.
1989.08.31 9월호 6천 5백부 발행.
1989.08.01 본지의 원활한 운영과 발행인 보좌를 위하여, 심의석 사장(전 해동화재보험주식회사사장), 최진삼 장로
(신지교회), 정상복 목사(순례자교회)를 운영위원에 추대하다.
1989.05.01 7월호 7천부 발행.
1989.07.31 8월호 8천부 발행.
1989.06.29 7월호 7천부 발행.
1989.05.31 6월호 8천부 발행.
1989.05.01 편집소위원장 김용준 박사를 씨알의 소리 제2대 발행인으로 추대하다.
(이보다 앞서 3월 11일 함석헌 선생 서거 이후 편집전체회의에서 "씨알의 소리는 여러분의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는함선생님의 유언을 상기하면서 선생님은 돌아가셨으나 씨알의 소리는 계속 발행 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장기려 박사를 발행인에 김용준 박사를 편집인으로 내정했으나, 장 박사의 발행인 고사로 김용준 박사를 편집겸 발행인으로 모시게 된것이다.)
1989.04.29 5월호 8천부 발행.
1989.04.19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함석헌 선생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고 기념사업회회장에 장기려 박사를 다시
모시다.
1989.04.08 4월호 7천부 발행하다.(4월호는 창간 19주년 기념호이자 씨알의 소리 통권100호가 된다.
통권 100호까지 함석헌 선생님의 명의로 발행되다)
1989.03.25 직원 조일환(소야)님 위암으로 별세하다.
1989.03.09 3월호 6천부 발행.
1989.02.08 함선생님,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장례식 거행하다.(2천여 조문객 참석)
1989.02.04 함선생님의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 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를 추대하다.
1989.02.04 함석헌 선생님 서울대학병원 12층 108호실에서 서거하시다.
1989.02.01 조일환 님 와병으로 한해수 님 근무시작.
1989.01.30 2월호 1만부 발행하다.
1988.12.29 신년호 1만부 발행하다.
1988.12.15 복간호 3천부 재판 발행하다.
1988.11.30 복간호 1만부 발행하다.
1988.11.01 업무책임으로 조일환 님(소야)기용하다.
1988.08.05 중구회현동 2가 아일빌딩 313호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편집책임으로 박선균님 및 직원에 박영자 님,
이영애 님을 기용하다.
1988.07.18 강제폐간 8년만에 씨알의 소리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다.(신문 3528-4-102651/등록번호 라-3676)
법적처리 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무려 7개월만에 등록증을 받게 된 것이다.
1988.05.04 함선생님은 투병 중에 계시면서 등록신청 4개월이 지났는데도 등록증을 교부해주지 않는데 대하여
"정기간행물 등록증 교부 촉구"라는 항의 공문을 문공부장관에게 내다.
1988.04.23 함선생님은 씨알의 소리가 아직 등록증이 교부되지는 않았지만 나올 것을 전제로 하고 편집위원 13명을
다음과 같이 위촉하고, 편집위원회 안에 편집소위원회를 두기로 하다. 계훈제(민권운동가)
김경재(한신대교수, 편집소위원) 김동길(연세대교수) 김용준(고려대교수, 편집소위원장)
김영호(인하대교수, 편집소위원) 노명식(한림대교수) 법정(송광사 스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사장)
송기득(목원대교수) 안병무(한국신학연구소소장) 이태영(가정법률상담소소장) 조요한(숭실대총장)
한승헌(변호사, 편집소위원)
1987.12.22 5공정권 말기 민주화의 열기 속에 언기법(言其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이루어질 희망가운데 씨알의 소리 복간신청을 문공부에 내다.
1987.11.10 전 편집장 박선균 편으로 1974년부터 77년까지 씨알의 소리 전면삭제분과 부분 삭제분을 모아서 "금지된 씨알의 소리"란 제명으로 단행본을 발행하다.(생각사 간 308면 값 3,500원)
1987.09.04 백병원에 재입원하시면서 월간 씨알의 소리 복간할 것을 마음에 결심하시다.
1987.08.29 퇴원.
1987.07.13 담관 및 종양부위 절제수술 4시간 받으시다.
1987.06.29 함선생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시다.
1980.08 함선생님 지시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한다는 통지를 내다.
(그러나 대부분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을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1980.07.31 7월호 5천부 발행 이후, 5공정권의 언론통폐합조치로 사전예고 한마디 없이 전혀 일방적으로 강제 폐간
당하다. 이로써 씨알의 소리는 1970년 4월이후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 폐간이후 두 번째 폐간당하기에 이르다.
1980-07 씨알의 소리 강제폐간 이후 함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콤에서는 일체 보도금지되었으나,
함선생님은 노자(老子)모임, 장자(莊子)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 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1980-05-16 창간 10주년기념 제주강연(연사: 함선생님, 서남동 교수, 장소:제주학생회관)을 마치고 제주 숙소에서
5. 17 확대 계엄령을 맞다. 여기서 서남동 교수 5. 17자정,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다.
1980.04.30 창간 10주년 기념호 7천부 발행하다.
1980.04.18 창간 10주년 기념전국순회 강연회개최 하기로 이르다.(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제주 등)
1980.04.01 3월호(1만부)발행. 계엄사 검열과정에서 20여페이지 삭제되는 관계로 74페이지로 발행하다.
1980.03.11 문공부는 후퇴하고 계엄사 단독으로 검열실시 통고받다.
1980.02.28 함선생님 등 687명 복권조치 발표.
1980.02.25 함선생님, 보통군법회의에서 1년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면제 처분받다. 문공부와 계엄사 검열
과정에서 15일 걸리다.
1980.02.19 1. 2월호 합본호(1만부)발행.
1980.01.14 1월호(통권 91권 9,000)발행.
1980.01.11 1월호 신건이 씨 글 검열삭제부분이 삭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9,000부 재인쇄, 재제본하다. 이 일로 인해 문공부주재 수사관에 의해 인쇄소공장장과 박편집장 호출당하여 경위서 쓰고 귀사.
 
1980.07.30 ~ 1988.12.22 전두환정권의 언론탄압정책으로 정부로부터 일방적인 폐간조치를 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