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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함석헌 > 씨알의소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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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역 사
1979-12-27

함선생님 계엄사 검찰부 소환 심문받다.

1979-12-12 [12. 12]사태 발생.
1979-12-10 함선생님 연행 15일만에 귀가.
1979-12-05 박선균 편집장 YMCA사건으로 연행, 즉결 20일 받다(정식 재판 청구로 10일만에 출감)
1979-11-26 함선생님, 박종태, 김병걸 씨 등 YMCA 불법집회사건으로 90여명 연행조사 발표(계엄사)
1979-11-24 함선생님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선출저지 국민대회에 참석 후 중부서에 연행, 익일 새벽 2시 귀가 하셨으나 계엄사에 다시 연행되다.
1979-11-15 함선생님 귀국.
1979-11-07 함선생님 모든 일정취소하고 귀국하신다는 편지받다.
1979-10-26 박대통령, 김재규정보부장 총탄으로 사망.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1979-10-19 함선생님 미국 피츠버그에서 전화.
1979-10-18 10월호(9,000부)발행.
1979-09-16 부산데모사건으로 부산일원 비상계엄령 선포.
1979-09 함선생님 카나다에서 국제전화하시다.
1979-09-11 9월호(8,000부)발행(특집. 제3세계)
1979-08-20 함선생님 스위스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1신 받다.
1979-08 8월호(1만부)발행.
1979-08-11 함선생님 출국(스위스행)
1979-08-08 함선생님 퀘이커세계대회참석 여권발급 받다.
1979-07-19 함선생님 목요기도회 참석 저지당하다(형사 4명)
1979-07-12 7월호(10,000부)발행. (지대 500원으로 인상하다.)
1979-06-18 함선생님,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당하다.
1979-06-02 함선생님, 김대중씨댁 방문 차 가시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두루마기 모두 찢어지다.
1979-06-01 함선생님 금요기도회 참석저지로 자택 앞 500m까지 기관원들과 싸우며 나가시다 손에 가벼운 부상을 입다.
1979-05-01 4 .5월합본호(12,000부)발행.
1979-04-19 창간 9주년 맞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1979-03-31 3월호(3. 1절 61주년 기념호) 12,000부 발행.
1979-03-27 함선생님 귀가 즉시 자택연금 무기한, 4월 22일까지 계속하다. (함선생님 모임 장자, 노자 부산모임 등은 형사 동행하여 허락하다)
1979-3-26 함선생님 대구 통일당대회 강연차 새벽 4:30분 형사들의 눈을 피해 출발하다.
1979-3-24 함선생님, 금요기도회 참석을 저지하고자 형사 및 기관원 12명 자택 앞길을 막다. 오후 4:30부터 함선생님 기관원들과 대치, 박선균 편집장, 박영자, 최응일 군등 합세하여 150m까지 밀고 나갔으나 좌절, 7시까지 2시간반동안 비맞으며 싸우다.
1979-3-13 함선생님 78회 생신 맞다.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진위원회 구성 (김대중씨 제안, 위원장에 윤보선 선생)
1979-03-05 미국퀘이커봉사회 바바라 바우만여사가 내한,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천서 전달하다.
1979-03-05 함선생님 검찰에 소환되어 윤보선씨 대 기자회견 내용 및 성명사건, 또는 작년도 3. 1절 성명 등 조사 받다.
1979-03-04 함선생님, 윤보선선생 댁에서 김대중 씨와 함께 기자회견, 3. 1절 성명 발표.
1979-03-01 함선생님 새벽 5시로부터 자택연금, 10여일간 계속 하다.
1979-02-27 2월호911,000부)발행. (특집. 농민)
1979-02-26 함선생님 미국궤이커봉사회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중앙일보에 1단기사로 보도되다.
1979-01-25 1월호(10,000부)발행. (특집. 언론자유) (값 400원으로 인상)
1979-01-23 월호 중 함선생님의 글[씨알의 希望]중 대구강연 저지에 대한 기사 5페이지 삭제에 대한 일주일 간 계속 항의하다. (학생데모 기사등 2페이지 회복되다.)
1979-01 송건호 선생, 깅용준 박사를 본지 편집위원으로 모시다.
1978-12-18 12월호(10,000부)발행(특집. 한국 불교를 말한다)
1978-11-18 11월호(9,500부)발행(특집. 노동자).
1978-11-16 함선생님 대구강연 약속으로 출발했으나 새벽6시 경찰. 기관원 7,8명 폭력으로 저지당하다.
1978-10-19 10월호(8,500부)발행(특집/폭력. 비폭력)
1978-09-21 9월호(7,500부)발행.
1978-09-14 문공부에서 검열삭제부분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후 교정지 한 벌을 다시 요구, 제 2차 확인검열 시작하다.
1978-08 7. 8월합본호(7,500부)발행.
1978-08-17 장준하 선생 3주기추도예배(YWCA강당)
1978-07-07 6월호(7,500부)발행(특집. 악)
1978-07-05 함선생님 자택연금 3일만에 해제되다.
1978-06-12 5월호(7천부)발행.
1978-05-11 3. 4월합본호(7,500부)
1978-05-08 함선생님 사모님 황득순 여사(77세)타계하시다.
1978-04-19 창간 8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1978-03-31 2월호(7천부)발행했으나 "삼고사 상품불매운동" 광고가 문제되어 7,000부 재제본후 발송되다.
1978-03-28 인천동일방직해고 근로자 30여명 본사 사무실 및 함선생님 자택에서 철야하다.
1978-03-18 함선생님 77회 생신축하모임을 위해 흥사단강당(동숭동소재)을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통고로,
흥사단 뒤뜰에서 축하모임을 갖다.
1978-03-01 최민화 님 사임으로 박선균 님(편집책임), 함은진 님 사임하고 박영자 님 근무 시작.
1978-02-24 함선생님 3. 1절 구국선언문 발표(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1978-02 1월호(7천부)발행(값 300원으로 인상, 100페이지로 확장)
1978-01-30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강연 개최(기독교회관, 연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김동길 박사)
1977-12 11. 12월 합본호(6천부)발행.
1977-10 10월호(6천부)발행.
1977-10 정연주 님 후원으로 최민화 님 편집책임 맡다.
1977-09 9월호 (6천부)발행.
1977-08 8월호 (6천부)발행.
1977-07 7월호 (5천부)발행.
1977-06 6월호 (5천부)발행.
1977-05 4. 5월호 합본호(4천부)발행.
1977-04 박선균 님, 변온섭 님 사임하고 정연주 님 본지 편집책임 맡다.
1977-03 3월호(3천부 발행)
1977-02 2월호(3천부 발행)
1977-01 1월호(3천부 발행)
1976-12-29 안병무 편집위원 10개월만에 출감.
1976-12 11. 12월합본호로 발행(3천부).
1976-11-04 카터 미대통령 당선.
1976-11-02 전태일 6주기 추모예배 금지통보 받다.(정보부담당관)
1976-10-04 9월호 2,500부 발행.
1978-08-28 함선생님 1심에서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선생과 같이 8년징역, 자격정지 8년을 받다.
1976-08-27 장준하 선생추모특집으로 발행하다(3,500부) 문공부 검열계속
1976-08-21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의 저지로 못드리다.
1976-07-30 7월호 2,500부 발행.
1976-06-26 5. 7월호 3천부 발행.
1976-06-03 조양내 님 사임으로 함은진 님 근무시작.
1976-04-19 당국의 불허로 창간 6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1976-04-15 백청수 편집장 사임으로 박선균님 편집장 다시 맡다.
1976-03-29 계훈제 편집위원 2년 징역 자격정지 2년 받다.
1976-03-26 함선생님 3. 1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다.
1976-03-04 백청수 편집장 및 조양내 직원 용산서에 연행, 일주일만에 귀가.
1976-03-03 오전 10:30 - 12시 본지 사무실 및 가택 수색당하다.
1976-03-02 안병무 편집위원 등 연행.
1976-03-02 오후 2시 정보부에 함선생님 연행, 3일만에 일단 귀가.
1976-03-01 3. 1명동사건 발생(신구교 합동미사후 구국선언문 발표 함선생님 가담)
1976-02-13 1. 2월 합본호 4천부 발행하다.(값 200원 인상)
1975-12-03 계훈제 편집위원 병보석
1975-11-15 전태일 5주기 추모예배 주최하다. (향린교회,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말씀)
1975-10-19 계훈제 편집위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다.
1975-09-08 7. 8월합본호 발행부수 4천부 되다.
1975-08-17 장준하 편집위원 등산 중 약사봉에서 불의에 서거하시다.
1975-06 본지 발행부수 다시 6천부로 떨어지다.
1975-05 5월호 편집후기 없이 백지로 내다.
1975-05-20 문공부 4월호가 긴급조치 위반되는 내용이 수록되었으므로 전국서점에 나간 본지를 회수하라는 연락받다. 이때부터 문공부 및 정보부, 본지를 다시 사전검열 시작하다.
1975-04-19 창간 5주년 기념강연회(젠센 기념관, 연사 김대중, 백낙청,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납치 이후 최초 강연, 청중 3천여명 참석)
1975-04-17 4월호 1만 2천부 발행(김대중 선생의 "民衆에의 敬愛와 信賴" 등 수록)
1975-03-25 3월호 1만부 발행(윤보선 선생의 "3. 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고문종식을 위한 선언" "민주국민헌장" 등 수록)
1975-03-17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기자 134명 축출사태 발생.
1975-03-15 함선생님 74회 탄신축하모임을 젠센기념관(당시 서대문소재)에서 갖다(안병무 박사 "함선생님의 역사관"발표)
1975-03-01 김동길, 김찬국 교수 석방기도회 참석차 출발한 함선생님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당하다.(이후에 수시로 자택 도청 또는 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가는 등 연금 계속.)
1975-02 김동길 편집위원 10개월만에 출감
1975-02 1. 2월 합본호 1만부 발행(장준하 선생 "박대통에게 드리는 공개서한"등 글 수록.)
1975 그 동아일보를 후원하기 위해 본지 독자들이 본사후원을 얻어 "자유, 정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아를 돕고자 여기 작은 씨알들의 뜻을 모으다" 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하는 함선생님 제자의 패난트 팔기 시작하다.
1975-02-15 긴급조치 1. 4호 위반자 석방.
1975-02-12 유신 헌법 국민투표실시.
1975-01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발생.
1975-01-16 함선생님 중정에 다시 연행 됐다 귀가.
1975-01 변온섭님 업무부장을 맡다.
1975-01-04 백청수 편집장 본지 발행과 정보부에 연행, 구류 20일 받다. 정식재판 청구로 10일만에 석방되다.
1974-11 11월호에 그동안 정보부에 의해 전문 삭제 되었던 글을 포함하여 "국민선언서, 시국간담회, 현시국을 어떻게 볼것인가?" 등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인쇄 발행하다.
1974-10 문공부 사전검열 거부키로 하다.
1974-09-23 함선생님 정보부 연행, 3일만에 귀가.
1974-05-28 4, 5월 합본호에 함석헌 선생의 글 "民靑學聯事件과 우리의 반성"전문삭제 당하다.
1974-04-30 박선균 편집장 사직, 백청수 님이 편집 및 업무를 담당하게 되다.
1974-04-20 창간 4주년 기념강연회 개최(연사; 법정스님, 이태영, 김동길박사, 함석헌선생) 김동길 박사는 이 강연후 기관원에 의해 연행, 민청학련사건 혐의로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 15년 받다.
1974-03-22 본사 사무실 2차 도난 (우리말 큰사전 1개 등 도난 당함)
1974-02-18 문공부 사전검열 중 함선생님의 글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전태일 추도 글)"과 유진오 박사의
"한국민주주의 장래" 전면 삭제되다.
1974-02-08 본지 사전검열은 정보부에서 문공부로 옮겨져 문공부가 관여하기 시작하다.
1974-02-04 신용순님 사임하고 조양래님 기용하다.
1974-02-01 편집위원 장준하 선생,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선고받다.
1974-01-25 본지 1월호 압수해간 4천부 제작비 121,200원을 정보부에서 본지 인쇄소에 지불 확인하다.
1974-01-22 새벽 2시경 함선생님 귀가
1974-01-21 본지 발행인 및 주간 함석헌 선생이 기관원에 의해 연행당하다.
1974-01-18 본지 1월호 4천여부 정보부 기관원에 의해 압수당하다.
1974-01-15 본지 편집위원 장준하 선생과 필자 백기완 선생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첫 구속 당하다.
1974-01-14 본지 1월호 4천부 제본소에서 압류당하다. (인쇄소 공장장 등 기관에 연행당해 본지 인쇄에 대한 조사받다.)
1974-01-11 박선균 편집장 자택에서 밤 10시 기관원에 의해 본지에 관해 조사 당하다.
1974-01-09 오후 3시 장준하, 법 정, 계훈제, 편집위원이 함선생님과 함께 본지에 대한 긴급대책회의하다. (긴급조치 저촉되는 기사 삭제후 50페이지로 축소 발행키로 의논하다.)
1974-01-08 오후 5시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 (유신헌법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위반자 15년 이하 징역발표)
1973-12 잡지 대금 신년호부터 1부당 150원 인상키로 하다.
1973-12-03 그 동안 사전검열 중 전면 삭제된 함석헌 선생의 "서풍의 소리",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장준하 선생의 "民族外交의 나아갈길" 천관우 선생의 "言論人이 본 오늘의 言論自由" 이태영 박사의 "야당집 마누라" 김동길 박사의 "苦言三章" 이병린 변호사의 "治者의 법과 被治者의 법" 변찬린 선생의 "山에 부치는 글" 을 합쳐 11月號2천부를 발행하다.
1973-12 정보부측에서 본지 삭제분을 완화할 것을 통고받다
1973-11-29 1972년 6월이후 정보부간섭으로 전면 삭제된 원고, 50페이지분 비밀 인쇄 착수하다.
1973-11-28 정보부에서 법적근거도 없이 계속 11월호를 대폭 삭제 검열하는데 대해 강력 항의, 사전검열을 거부키로 하다.
1973-11-13 고 전태일 제 3주기 추도예배(젠센기념관) 개최하다. (함선생님 설교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
1973-06-01 법정 스님을 본지편집위원으로 모시다.
1973-05-22 창간 3주년 기념 독자모임 개최(당시 정식 강연회가 허락되지 않았음. 장준하선생의 씨알의 소리 경과 보고, 함석헌 선생의 인사말씀 후 창간 3주년 기념보자기500매 참석자 및 정기구독자에게 배부하다.)
1973-05-05 창간 3주년기념호 5천부 발행하다.
1973-01-24 박상희님 사임하고 신용순님 경리 일을 맡다.
1973-01-01 문대골 업무부장 의원사직 후임으로 백청수님 업무 일을 맡다.
1972-12-29 송년호(통권 17호) 6천부 발행
(계엄령해제됐으나 정보부 다시 관여로 함선생님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삭제되는 등 검열계속)
1972-12-13 계엄령해제
1972-12-07 11월호 검열후 2천부 발행.
1972-11-13 오후 7시 함선생님 장준하선생님 귀가.
1972-11-21 오후 7시 기관원 2명에 의해 함선생님 연행되다
1972-11-14 장준하 편집위원 기관에 연행되다.
1972-10-31 본지 10월호 계엄사 검열로 40페이지로 발행하다.
1972-10-17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국회해산, 헌법일부 효력정지, 비상국무호의, 헌법개정, 1개월내로 국민투표 실시 공고)
1972-11-17 본사 사무실에 도둑(우리말 큰사전 및 라디오 도난 당함)
1972-19-20 9월호 5천부 발행.(함선생"오천만 동포앞에 눈물로 부르짖는말" 발표)
1972-08-23 본지 8월호를 인쇄중지당했다가 시판하지 않는 조건으로 발행하게 되다.
1972-07-31 "민족 통일의 구상"이란 대토론회를 YMCA 8층 식당에서 개최하다.
1972-07-04 남북자주평화통일 원칙합의,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07-03 대광인쇄소(중림동 소재)와 인쇄계약 체결, 이때부터 정보부가 본지발행에 사전 개입하기 시작했고, 본지는 거기에 대처하기에 이르다.
1972-06 같이살기운동은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이라해서 논문모집 중단당하다.
1972-05-31 5월호(통권11호) 2천부 비밀인쇄 발행 배포하다.
1972-05 창간 2주년 기념호는 장준하선생 댁에서 온식구가 비밀리에 가제본하여 만신창이가 된 4월호를 독자에게 그대로 발송하다.(함선생님 "같이 살기 운동을 일으키자"는 글 발표 및 같이 살기운동 논문모집)
1972-05-02 오후 3시경. 사복형사 10여명이 제본소를 급습, 본지 문부장을 동대문서로 연행하고, 4월호 제책 중지 및 압류상태가 되다. 이 사실을 박상희님이 현장에서 연락, 장준하 편집위원과 박선균 편집장이 달려가 제책중지, 압류상태가 된 4월호를 인쇄된 전지 그대로 당시 용두동 소재 장준하 선생 댁으로 옮기다.
1972-05-01 박상희님 본사 직원으로 기용하다.
1972-04-29 본지와 인쇄 계약한 전광산업신보사가 일방적으로, 인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을지로 6가 무명인쇄소에서 본지 4호(창간 2주년 기념호)를 인쇄하여 청계천 7가 모제본소에서 당국의 눈을 피해 제본하기에 이르다.
1972-04-19 창간 2주년 기념 강연회를 대성빌딩(당시 명동소재)에서 개최하다. (함선생님은 여기서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하다"는 강연을 하심)
1972-04-10 전광산업신보사의 일방적인 해약통고에 의한 해약승인은 부당하다는 이의 신청을 문공부장관 앞으로 내다.
1972 전광산업신보사로부터 인쇄계약 해약통고로 인한 인쇄인 시정통보를 문공부로부터 받다.
1972-04-01 본지 편집위원으로 이병린 변호사, 김성식 박사, 안병무 박사, 장준하 선생, 천관우 선생, 이태영 박사, 계훈제 선생을 위촉하다.
1972-03-29 시중서점에 배본된 본지 2,3월 합본호 3천여부가 당국에 의해 압류 및 압수당하다
1972-03-17 2,3월호(합본) 6천부를 발행하다.
1972-02-29 전광산업신보사(당시 용산동 소재)와 인쇄계약을 체결하고 문공부에 등록변경신청을 내다.
1972-02-03 시중서점에 배본된 본지 신년호 약 2천부가 당국에 의해 판금조치를 당하다.
1972-01-30 제 8호(신년호) 6천부 발행하다.
1972-0-28~30 제 1차 씨알의소리 독자수련회를 안양농민교육원에서 개최하다.(주제 "세계평화의 길&quot)
1972-01-22 본사와 인쇄계약한 삼명 인쇄소 측에서 "더 이상 씨알의소리 인쇄를 계속할 수 없다"고 이유없이 해약 통고를 받다.
1972-01-15 종로서적센타와의 총판계약을 이유없이 해약당하다.
1972-01-13 본사 문대골 업무부장이 수사기관에 연행, 30여시간의 심문도중 구타당하는 등 그후 수차례의 환문을 받다.
1971-12-29 12월호(제7호) 5천부 발행.
(함선생님 고희를 맞아 "함석헌을 말한다"는 특집 및 함선생님 "비상사태에 대하는 우리의 각오"발표)
1971-12-06 국가비상사태선언
1971-12-02 함선생님 고희 축하모임 및 기념강연회(이 자리에서 이병린, 안병무, 안병욱, 지명관, 계훈제 씨 등 5명의 대표이름으로 씨알의 소리"영구구독자 300명 6개월 내로 모집, 3백만원 특별기금 확보 운동의 전개키로 하다).
1971-11-18 11월호 (제6호) 5천부 발행 (함선생님, "우리나라의 살길" 김동길 박사 "용감한 국민이라야 산다"등 발표)
1971-11-13 청계천 평화시장에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다 분신자살한 고 전태일 1주기추도회 및 강연회를
개최하다(장충동소재 경동교회)
1971-10-21 10월호 ( 제 5호 ) 4천부 발행 (함선생님,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발표)
1971-10-01 마하트마 간디 탄생 102주년 기념강연회를 인도영사관과 공동주최하다(한국일보 12층 강당).
1971-09-14 9월호 (통권 제 4호 ) 5천부 발행 (함선생님, "민족통일의 길"발표)
1971-08-15 "씨알의 소리"승소후 복간호(통권 제 3호 )4천부를 발행하다. (이 복간호에 본지 승소 경위가 실림)
1971-07-01 씨알의 소리를 8월호부터 복간하기로 하고 편집장에 박선균님, 업무부장에 문대골 님을 기용, 복간호 발행에 착수하다. 청파동소재 달성인쇄소와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을 희망함으로 중림동 소재 삼명인쇄소와 계약하고 진행하다.
1971-07-06 대법원 재판장 김치걸, 사광욱, 홍남표, 김영제, 양병호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 상고를 기각, "씨알의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판시, 본지의 승소판결을 확정하다.
1971-05-04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 윤영일, 김석수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씨알의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 본지 승소판결를 내리다.
1971-04-19 폐간으로 인한 법적투쟁관계로 1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1971-06-12 폐간 중에 드리는 편지'를 프린트로 발행하여 독자에게 보내다.(4회)
1970-08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하시다.
1970-06-08 무료변론으로 자진,소송대리인으로 나서주신 이병린 변호사에 의하여 서울 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청구의소'를 제기하다.
1970-05-29 인쇄인 변경등록을 필하지 않고 타인쇄소에서 본지 제2호를 인쇄했다는 이유로 문공부 공문 출1028-8973으로 발송된 폐간통고를 받다.
1970-05-25 창간 당시 본지와 계약한 선일인쇄(당시 서대문소재)측에서 더 이상 인쇄를 계속할 수 없다하여 부득이 이우인쇄소(당시 중구소재)에서 인쇄하여 제 2호를 발간하다.
1970-04-19 "씨알의 소리" 창간하다.(총페이지 56, 발행부수 3천부, 값100, 발행인 및 주간 함석헌 선생, 편집책임 전덕용 선생)
1970-01-28 함석헌 선생은 "종교경전의 재음미, 문명의 비평, 역사적 반성, 시사논평,수상 등을 통하여 건전한 상식을 길러 민주주의 발전과 씨알의 깨우침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 (월간) 등록을 신청하여 교부받다.(등록번호 라-1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