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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바보새 씨알학당 5강-<한국역사>는 민족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 김조년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8-03 22:24 조회141회 댓글0건

본문

바보새 씨알학당 제1기 인문학 강좌   

● 일 시 : 2011년 11월 18일-12월 2일(매주금요일) 오후 2~4:30
● 장 소 : 전북대학교 법과전문대학원 진수당 2층(바오로홀) 

12월 2일 금요일 오후 2~4:30
5강 (민족 교육) <한국역사>는 민족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 김조년  


<한국역사>는 민족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것은 순전히 역사를 연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의 폭풍우를 견디며 그 밑에서 어린 마음들에게 씨를 넣어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가르치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필자 자신도 수없이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연구서가 아니라, 한숨이요 기도요, 위로였다. 식민지배 아래에서 자기를 온전히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빼앗겼다는 것 자체를 모르게 하고, 원래부터 그렇게 돼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시대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 자신을 말살하려는 강력한 세력에 맞서서,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맘으로 조곤조곤, 분노하고, 눈물뿌리고, 한숨을 쉬면서 앞날을 도모하는 혁명적 이야기였다. 언젠가 날이 좋아져 따뜻하고 물 흐르고 바람이 불고 새가 울면 캄캄한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들을 기대하는 농부의 맘으로, 꽁꽁 언 마음 밭을 휘젓고 후벼 파서 한 두 알의 씨알을 꼭꼭 집어넣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그래서 이 글은, 이 글쓰기는 장기간에 걸친 독립운동이요, 혁명운동이었다. 그런데 무슨 씨를 뿌렸는가 하는 문제다.

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
과학적이려는 양심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어린 마음들에 씨알을 넣어주자는 생각이었다.(16) 그런데 이것들은 서로 모순된다. 믿으려는 의지나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은 서로 배타적일 때가 많다. 그것을 다 유지하고 간직하려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다. 그러한 모험을 무릅쓰고 민족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꾸로 물으면, 우리 민족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민족에까지 갈 것 없이,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무엇을 배웠는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자는 책인가? 아주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뱉어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 글쓰고 연구하는 자세: 객관과 씹고 또 씹는, 생각을 더하는 자세. 소나 염생이가 풀을 뜯고 먹이를 먹어 씹고 또 씹어 삼키듯이, 한 번 삼킨 것을 다시 꺼내어 또 씹어 삼키듯이, 사물과 사건과 사람과 시대를 놓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씹고 또 씹는 그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제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는 그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아무런 지도 선생도 없고, 풍성한 자료도 없으며, 글을 쓰거나 읽는 자유가 보장되지도 못한 곳에서, 하고자 하는 말, 전하고 싶은 말을 걸러내는 체에 걸리지 않고 술술 빠지게 하려니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어야 할까? 그러면 그것은 억압체제에서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생각과 말과 글로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아주 철저하게 곱씹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 맘을 움직이고, 글쓰는 내 손이 춤을 추게 하며, 읽는 이의 정수리와 가슴을 파고들어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설사하지 않고 제대로 소화한 것이요, 남의 것을 따온 것이 아니라 꼭같은 말을 하더라도 내 글이 된다. 글을 쓰되 똑 이렇게 쓰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네 글을 쓰라는 가르침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날카로운 재봉칼 같다는 표현처럼, 아주 부드러운 듯 더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분명함이 있는 글(二月春風似剪刀), 폐부를 찌르지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 나는 나이고 싶었다.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다. 남의 종교가 아니라 내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온 뫔으로 가르친다.(18) 그렇다면 나는 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를 떠나듯이, 새끼가 자라면 어미둥지를 미련 없이 떠나듯이, 제자도 자라면 스승의 품과 그늘 아래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이 때때로 배반이 될 수도 있고, 극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자기의 생명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함석헌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우려고 하지만, 그에게 종속되는 것을 그가 바랄까? 만약 그렇게 바란다면 그도 작은 사람이요 스승은 아니다. 우리는 함석헌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혁명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나이고 싶었다’고 할 때 그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도대체 ‘나’가 되고 싶은 것을 막는가?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하는 나, 국가, 종교, 민족, 스승, 가족, 친구로부터 자유하는 나. 그러나 무엇인가에게는 사로잡힌 나. 사실 나이고 싶다고 할 때 그 나를 사로잡는 것은 껍질을 벗어버린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일 수 있고, 자유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진리를 무엇이라고 파악하는가?

-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것, 종교마다 형식이 다를 뿐 그 알짬에서는 같고 하나라는 것.(18) 모든 종교는 만인구원의 종교다. 믿는 자만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 예수, 석가의 종교는 만인의 종교였다.(19) 그래서 천당도 지옥도 문제가 되지 않는 자리의 종교를 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자리가 곧 뜻의 자리라는 것이다. 죄인, 의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구원하는 자리, 유신론자, 무신론자를 다 구원하는 자리: 다 같이 가는 자리를 찾으려고 뜻이란 말로 표현한다.(20) 모든 종교는 각자 자기 종교가 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신의 이름을 부른다. 다른 이름은 마치 그것과 다르다는 듯이. 그러나 그것은 그냥 그렇게 다르게 부르는 이름일 뿐, 실체는 하나다. 그 하나의 실체가 바라는 것은 만인의 종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특정 종교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지배하려는 속성의 발로일 뿐이다. 참종교는 조직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며, 경전도 아니다. 참만남을 통한 구원이 있을 뿐이다. 그 구원은 보편적이다.

- 세계주의를 주장하고, 국가주의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온 뫔으로 주장한다. 세계는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니 온갖 폭력주의가 나온다. 반평화, 반생명, 반인권, 반문명의 온상이 바로 국가주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국가는 인류가 낳고 자라는 데는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만큼 성숙하고 자랐다는 것이다. 이런 글이 있다. 1960년과 61년 사이에 쓴 글이다. “우리 종교는 세계가 하나 되는 일입니다. 세계가 하나 됨이 세계구원입니다. 그것이 유일의 길입니다. 이제 세계가 하나 되지 못하면, 이날 껏 쌓아 올렸던 인류의 문화가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극한점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해탈이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자라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껍질을 벗기는 역사입니다. 이번에도 또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 전 어느 때에 벗었던 껍질보다도 가장 두텁고 가장 굳은 껍질을 벗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국가주의, 폭력주의라는 껍질입니다.”(함석헌, 『생활철학』, ‘생활철학’, 일우사 1962, 356쪽)

한자가 알려 주는 국가의 나라國자를 이렇게 분석하여 설명한다. 땅(一) 위에 사는 사람들(口)을 무기로서(戈) 테두리를 쳐서(口) 보호하는 나라(國). 이것은 언제나 무기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가 나라다. 무기(무력)는 두 가지의 기능을 한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제재하고 통제하여 일정한 질서를 잡으면서, 동시에 밖으로부터 오는 다른 힘을 막거나 밖으로 나가려는 내부의 힘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하여 일정한 테두리를 정하여 둔다. 그러므로 나라는 언제나 다른 나라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다. 그런데 이러한 테두리가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 무력의 테두리도 달라졌고, 종교와 문화와 경제의 테두리는 훨씬 더 밖으로 외연을 넓혀 나간다. 이제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사람만이 있다는 것이다. 땅(__) 위에는 오로지 사람(口)만이 있다. 이것이 국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원칙이요 철학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것들이 더 확장되었다. 사람(口)이라는 것을 생명(生命)이라는 것까지 확장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한낱 무수히 많은 다른 생명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라를 한다는 것은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하나로 보는 것만이다. 땅 위에는 사람과 함께 무수히 많은 나무들, 풀들, 기고, 걷고, 날고, 헤엄치는 동물들이 있고, 그것들에 속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미생물들이 있다. 살아 있지 않다고 보는 무생물들이 또 있다. 이것들과 사람이 한 생명이라는 단계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여기에서 국가, 종족, 종교라는 것을 아주 하잘 것 없는 소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잠깐 보호하기 위해 있는 둥지에 불과하다. 그 둥지를 벗어나는 것은 자라는 생명 그 자체다. 죽으면 그 속에 머물러 있겠지만, 살았다면 떠날 것이다.

- 이러한 것은 바로 고난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고난이란 어떤 과정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그냥 고난일 뿐이다. 이것이 고난을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다.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이라면 당연히 고난 속에 들어가게 돼 있다. 그냥 삶은 고난이라는 것, 고난은 고난일 뿐, 고난 뒤에 무엇이 오고 어떻고가 아니다.(22) 그러므로 그 고난은 그냥 고난으로 덥석 받아 들여야 할 뿐.(22) 이 부분이 어려운 점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고난을 제대로 맞을 때, 그것을 통과하는 생명의 질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초정신적인 엉뚱한 새 사람을 낳게 된다.(28) 이것이 궁극의 것이지 않을까? “이제 엉뚱한 것이 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나와서 ‘내가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이 세계를 통일했듯이, 그 엉뚱한 것이 나옴으로써 이 우주가 어지러움, 허투루임을 면하고 건짐을 받을 것이다. 지금 있는 우리말로 하면, ‘뜻있는 것’이 될 것이다.”(28)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엉뚱한 것이 나오게 될까? 오늘날 모든 인간의 제도는 바로 이 엉뚱한 것을 나오지 못하게 하는 종합체계다. 특히 교육제도, 행정체계, 가족제도, 종교와 문화체계가 온통 이 엉뚱한 것을 막는 종합장치다. 사실 삶은 모든 것이 이 엉뚱의 연속생산체계다. 이 엉뚱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말로 하면 ‘날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애벌레와 나비의 관계를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엉뚱한 것을 낳는 탁월한 일을 생각해 낼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나라, 민족, 종교, 문화, 역사, 가정, 교육 따위를 무시하고 살 수가 없다. 그것들은 하나의 뿌리다. 그러한 것에 자리를 잡는 뿌리다. 일단 그것들에 나를 튼튼히 자리 잡게 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을 섭취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명의 최종 목적인 날자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뿌리를 내리는 사실은 엄격히 나누면 두 가지란다. 인생과 역사다.(30)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역사이해라는 것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래서 사람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제대로 삶을 꾸리려면 그가 어떻게 살았던가 하는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깊이 사색하는 것이며, 전체 속에서 나를 보고, 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행위다. 지금을 보는 것이며 영원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에서 지금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깊은 사색, 씹고 들이파는 작업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나를 찾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31)

역사 공부하는 목적:

“현대를 건지려면 군축회의도 필요하고 경제회의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새로운 세계이상을 세워야 할 것이다. 머리가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도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역사를 고쳐 읽자는 것이다.”(35)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1) 역사는 지나간 것(과거)이 아니라는 것: 지금 속에 살아 있고, 되어가는 것: 새세계관을 지어내는 풀무
2) 사실과
3)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지만,
4) 하나의 역사; 역사풀이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뿌리, 하나의 근원, 하나로 흘러가는 역사라는 것을 가르치자는 것이다.(36)

역사공부의 몇 가지 주의할 점들이 있다.

사실: “내 주관과는 관계없이 따로 서서 객관적으로 뚜렷이 있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에는 주관의 렌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42) “사실은 결국 사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해석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골라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사실이라고 보는 대로의 사실이다. 삭아서 내 살이 된 물건이다.”(42)

씨알이 요구하는 역사는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다.
세계의 밑을 흐르는 정신을 잡는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씨알은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는 마지막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사명이 있다.(43) 역사가의 자격은 그 기억에 있지 않고, 판단에 있다. 그것은 식에서 온다. 識은 뚫어 봄, 내다봄, 맞춰봄, 펴봄이다.

- 무엇을 가르치자는 것인가?

자기 자리를 떠나서 자기를 보라는 것
인생은 떠나 인생을 보고
역사를 떠나 역사를 보라는 것
떠난 자리에서 보라는 것
엉뚱한 것이 나오는 것은:
나뭇잎의 한들거림
벌레의 나풀거림
새의 펄럭거림이 --> 이 모든 것이 지구궤도를 뚫고 닫는 로켓을 겨누고 있듯이

원숭이의 고개 기웃거림
원시 인류의 미친 춤
20세기 문명한 종교,
철학
과학 따위의 --> 이런 것들도 다 초정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새

사람의 꿈, 즉 공중을, 하늘 밖을 나는 꿈을 꾸었는가?

조로아스터
석가
노자
공자
예수
우리 조상들

우리들 --> 이들이 모두 함께 꾸었던 꿈, 이 꿈들을 뭉뚱그려서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 -> 여기에서 엉뚱한 것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거론된 위대하다는 사람들만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꿈은 전혀 허투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합하여 엉뚱한 것을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교육, 위대한 교육에서 나오는 것이다. 위대한 교육에서 위대한 혼이 길러지고, 위대한 사업이 만들어진다.(152) 이 교육은 조직적이라야 하며, 그런 조직에서 양심, 집단양심이 나오게 된다. 이것을 통하여 꿈의 실현이 가능해 질 것이다.

- 흥정으로 살지 말라는 것; 나라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흥정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은 것은 흥정으로 통일한데서 비롯되었다.(신라-당) 이것은 속임수요 야바위다. 직바로 살라는 명령이다. 그렇게 살 때 자기를 살고, 자기를 찾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의 눈치만 보는 종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뜻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모든 것에서 뜻을 묻고, 캐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비끄러진 길은 영원히 빗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수정할 길이 있다는 것이다.(181) 그것은 바로 아가페에서 나온다. 어떻게 하여도 구원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냥 건져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궤도에, 그 판에 올라가기를 바란다. 실패하면 또 궤도를 수정하거나 길을 바꾸어서라도 새롭게 시도하게 한다. 그러나 거저 덥석 안아서 구원의 자리에 앉혀 영원히 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위급할 때, 필요할 때 그런 구원의 손길이 있지만, 그것은 깨어나라는 뜻이요, 응급조치이지 그것으로 다 됐다는 것은 아니다. 제 힘으로 일어서고, 제 발로 걸어가서 제 손으로 일하고, 제 머리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음의 것을 믿어야 한다. 문제를 내는 역사는 언제나 문제를 푸는 열쇠까지 함께 주는 것이다.(182) 역사는 언제나 밀물과 썰물을 함께 준다. 그것은 끊임없는 실패를 바로잡아 보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고 또 오는 것이다. 뜻을 찾으라는 신호다.

- 민중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다.(188) 감정과 살림살이(경제)가 주도하는 듯하나, 사람은 언제나 뜻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민중을 움직이려면 새윤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의 대세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다.(189) 그 뜻을 실현하는 데는 누구인가 죄짐을 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 자체다. 씨 자체다.

- 절대긍정의 믿음 안에서:

성경은 사람이 우주 인생의 근본 알몸인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하자는 것
그 생명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 역사를 낳는 것이 생명이다.(51)

성경은 아가페, 사랑, 자비, 인, 희생의 실현 이야기다. 그것을 은총이라고 한다. 그래서 절대긍정의 자리에 설 것을 요구한다.

『한국역사』는 성경처럼 현실세계를 설명하자는 과학이 아니고, 뜻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설명의 자료로 현실을 이용하였을 뿐이다.(57)

그리하여 뜻이 실현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자는 주장이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삶은 힘이 찬다.(59) 여기에는 목적과 수단이 모두 옳아야 함을 강조한다.

“생명의 근본 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산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은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를 항상 자유하는 생명을 가진 인격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60) 개인이든 민족이든, 나라든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바로 이 자유하는 정신으로 가득한 것이기를 바라는 맘이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인간을 역사에 대한 도덕적 책임자로 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원하고 원치 않고 간에 도덕적 책임이 지워졌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이 우주를 도덕적 질서로 체험한다는 말이다.”(61) 민족, 역사, 나라, 시대는 언제나 도덕적 책임을 진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고난의 역사가 풀린다고 가르친다. 그 책임의 내용은 무엇일까?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간다 하지만, 저는 어느 때에도 세계를 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므로 저는 가는 곳마다 험로와 난관이 기다린다. 반드시 반가운 인생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인생관이 어디 있을까?”(61)

이 두 가지에서 볼 때, 자유와 책임이라는 양 축을 가지게 한다.

“한국 사람으로 난 것은 한 개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세계 어느 구석에 가든지 한국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한다. 국적의 변경이 되었거나 말았거나 간에 진다. 이 나라를 도덕적으로 향상시킬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 한국은 전 우주적 과정에서 내가 서는 자리다.”(63)

- 역사는 하나:

“옛날에는 문화의 교통이 널리 되지 못한 까닭으로 각 민족은 서로 자기네만이 홀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역사라면 언제나 홀로 서 있는 민족사 혹은 국가사에 그쳤다. 그러나 역사가 나감에 따라 서로서로의 교통이 찾아졌고, 그러한 따로 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더구나 두드러진 세계적 종교 안에는 일찍부터 각 민족은 다 한 하나님 혹은 생명에 의한 한 핏줄로 지어졌고 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라는 이상이 주장되어왔다. 그러므로 한국을 외톨로 서 있는 한국으로만 알아서는 참 알았다 할 수가 없고 반드시 세계 전체의 산 관련을 가진 것으로 알아서만, 세계역사의 안에서 그 자리를 발견해서만 비로소 바로 알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늘 세계의 한국, 우주의 한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산 한국역사는 산 세계관,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씌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의 가슴으로만 읽을 수 있다.”(65-66)

역사는: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라면 세계역사는 한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역사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기록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찾는 기록이다. 브라마나의 아트만을 찾음이요, 아트만의 브라마나를 찾음이다.(....) 사랑을 찾음이다.”(66)

“황금시대보다는 어지러운 때에, 영화보다는 떨어짐에, 이긴 자보다는 진 자에, 평안보다는 고통에, 즐거움보다는 죽음에 보다 더 귀히 여기고 보람 있게 여기고 존경할 것이 들어 있으며, 참으로 영원한 감격이 될 보화가 들어 있다.”(67)

- “역사에는 단계가 있다. 역사를 아는 데 필요한 또 한 가지 조건은 이를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올라가는 층계라 하고 구르는 바퀴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다시 돌아온다,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면서 또 아니다. 역사는 결코 똑같은 것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그저 되풀이 되풀이 끝없이 하는 것이 아니요,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적게 보면 되풀이하는 듯 하면서 크게 보면 자란다. 생명의 운동은 겹으로 되어 있다. 마치 지구의 운동과 같다.”(73) 자전과 공전, 공전의 또 큰 공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그 근본 생각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혹은 위로 올라가는 단 한 번의 운동, 곧 뜻을 이루기 위한 자람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본 자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영원의 바퀴를 이 인생의 일생으로 비유해보는 수밖에 없다. 제대로 완성인 듯 하면서 영원의 미완성이요 늘 되풀이인 듯 하면서도 진화인 이 일생이다.”(74)

- 역사는 단련이다. “근대식 국가의 기원이 되는 시대다. 이 시대는 회의의 시대요, 괴로운 싸움의 시대다. 세속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필연에서 자유로, 종살이에서 아들로 완전히 깍지를 벗기 위하여 변화하기 위하여 치르는 시험이요, 다듬음이다.”(77)

“이제 인류의 문명은 전쟁으로 끝을 맺느냐, 전쟁 그것이 끝을 맺는 새 문명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나 그 속에 품고 있는 역사의 뜻은 역사의 먼동 틀 때에 뿌려진 정신의 씨가 덮어 누르는 가시덤불을 뚫고 쑥 올라와 새 단계에 오르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주 질식되어버리고 지구가 가시밭이 되고 마느냐 하는 데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가 이기느냐가 문제 아니다. 무슨 주의가 이기느냐가 문제 아니다. 인류 전체의 싸움이다. 정신적인 방향으로 결정적으로 키를 돌리지 않는 한 소망이 없는 자리에 이르렀다.”(77-78)

- “모든 것에 뜻이 있다. 모든 것이 뜻이 있어서 되었다. 죽은 것은 나기 위해서요, 실패한 것은 이기기 위해서다. 동서양이 서로 갈라진 것은 서로 도와 모두 높은 데 오르기 위해서다. 마치 두 다리가 서로 갈라지고 서로 반대하기 때문에 앞으로 아나가듯이, 동양은 정신을 맡았고 서양은 물질을 맡았다.”(79-80) 어느 한 쪽을 정신으로 보고, 다른 쪽을 물질로 본 것은 지나친 도식적 분석이라고 보지만, 이 논리의 근본 취지는 다른 것들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에 있다. 어느 하나가 온전하여 다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살리고 살린다는 뜻이다. 동서양의 주도권 다툼은 몇 번 돌고 돈 다음에라야 잘 섞여서 하나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으로 갈 것은 분명하다. 지금 G2를 말하고, G20를 말하고, 양대 세력이니, 중국의 득세요 미국의 쇠퇴를 말하지만, 그런 흥망성쇠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더 돌고 돌면, 세계가 하나라는 것이 더 깊이 알려지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까지는 분명히 고난이 거듭될 것이다.

“역사는 옛날이야기의 자료도 아니요, 심심풀이를 위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도덕의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역사적 우주정신을 붙잡는 일이다. 미래에 대한 일정한 지시를 주자는 일이다. 물론 역사는 우리의 의지를 뛰어넘어가지고 나간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역사는 번져갈 대로 번져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알지 못하는 데 우리에게는 큰 차이가 생긴다. 알면 자유요, 모르면 필연이다. 알면 은총이요, 모르면 숙명이다. 아는 것으로 자녀가 될 수 있고, 모르는 것으로 종이 될 수 있다.”(93)

이래서 믿음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주정신을 알자는 것이고, 그것은 주체로서, 주인으로 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객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믿음으로밖에는 말하거나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함석헌의 『한국역사』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다음의 구절은 그것을 더욱 분명히 알려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는 가운데서 진리를 보여주었다. 나를 건진 것은 믿음이었다.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 면류관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역사를 뒤집고 그 뒷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 깨달았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 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96)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가, 역사 자체가, 아니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삶이 곧 고난이다. 가시면류관을 쓴 자가 곧 왕이다. 그래서 역사를 쓸 때 택한 인물 역시 실패자들이다.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등장인물들이 그래서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뜻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용하는 것이요, 찾아내는 것이요, 살려내는 것이다.”(101)

“개인은 저만이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개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개인의 뒤에는 언제나 전체가 서 있다. 양심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요, 나기 전에 벌써 그 테두리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은 생리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족적(族的)인 사회적인 존재다. 개인은 전체의 대표다. 전체에 떨어진 나는 참나일 수 없고 스스로의 안에 명령하는 전체를 발견한 나야말로 참나다. 그것이 참 자기발견이다.”(86-7)

- “역사는 단순히 발생하는 것, 되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도 이루어 서는 것, 건설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신의 나타남이다. (....) 그러므로 주인은 환경이 아니요, 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살았노라는 의식을 가지는 민족이다.”(112-3)

‘인’하고 착하고 날쌘 우리가 왜 오늘과 같이 이 모양 이골이 됐는가? 역사의 각본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을 따지고 들면 이렇단다. “한국 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컴컴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아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broodling over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126)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 ‘생각하는 씨’을 주장한다.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것은 종교를 깊은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외래종교, 즉 유교, 불교, 기독교가 민중을 건지는 일을 하지 못하고 만다.(127) 자기를 깊이 파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이 없다. 여기에서 자존이란 인격적 자각에서 오는 것으로, ‘천하를 갖고도 내 나라를 못 바꾸며, 우주를 가지고도 내 인격은 누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자존하지 못하면 자유가 없다. ‘스스로’라는 것이 생명의 원리다. 이 자유 없이는 인, 착함, 평화주의가 다 얼빠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이 필요하였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요, 살고자 함은 살아 있기 때문이요, 살아 있음은 살려주시기 때문이다. 살려두시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증거다. 우리의 맡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고난의 초달(楚撻)을 견뎌야 한다.”(130)

- 공동의 꿈:

그렇다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게 하려면, 아니 싫으면 밀어서 없애버리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하여 살려 두는가? 거기에는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480) 그것은 바로 처음에 우리에게 준 것, 즉 인(仁), 착함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할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다. 그 싸움은 폭력과 미움으로가 아니라, 사랑의 싸움이다.(481) 이렇게 해야 문명의 전환을 가져오는 새로운 싸움이 된다. 그 일을 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산 사람, 진리의 사람이다. 이들이 핵심단체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484) 그것은 현실 삶에서 생존경쟁의 극복으로 나타난다.(485)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함께 사는 삶, 공동체를 주장하고 실험하여 보았다. 이러한 것은 바로 반성하여 본 결과로 얻은 귀한 보석이다.

엄밀히 따져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전체는 다 반성이다. 가르침이다. 글쓰기의 시작도 그것이요, 끝도 결국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민족의 자기교육이다.(488) 그래서 지성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다. 지성은 바로 계몽의 책임을 지며(492), 계몽은 절대의 진보, 즉 자유에 이르게 하는 길을 제시하고 가르친다.(489, 490)

- 궁극에 우리가 도달하여야 할 지점은 무엇일까? “지금껏 불교에서 해탈이라 했던 것은 완전한 해탈이 아닙니다. 지금껏 기독교에서 구원이라 했던 것은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제 그 뜻을 완성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와 절에서 힘써 가르친 것은 개인의 해탈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체질은 사회적, 역사적 살림을 통해서만 완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탈 구원도 역사적 사회적으로 체험돼서만 완전하다 할 것입니다. 이제는 전 인류적으로 그것을 성취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국가 민족의 껍질을 벗어야 정말 자유하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회개하려서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는 민족의 죄, 인류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역사적 사회적으로까지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함석헌, 『생활철학』, ‘생활철학’, 일우사 1962, 358쪽)

궁극의 관심은 혁명하자는 것이다. “혁명(革命)은 껍질 베끼는 일입니다. 혁(革)은 피(皮)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털이 있으면 피고, 털을 빼면 혁입니다. 가죽에서 털을 빼고 익히면 아주 면목 일신해 다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혁에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혁은 변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류의 문화에서 폭력주의란 털을 뽑는 일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뽑아 버리는 날, 새 시대의 뜻은 들어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우리 민족에게 세계사적 사명 주자고 한 것은 이 고난을 묶는 털 뽑는 일로 할고 기쁨으로 견디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것은 폭력주의의 맛입니다. 그것을 잘 참아 이기고 폭력으로 갚을 생각을 아니함으로, 우리는 인류에서 폭력주의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소국가의 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평화주의로, 함으로 인하여, 인류를 오랫동안 시달리고 그 발달을 방해하여 온 잘못된 국가주의를 세계사에서 완전히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함석헌, 『생활철학』, ‘생활철학’, 일우사 1962, 358쪽)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이나 국민의 개념에서 씨ᄋᆞᆯ의 개념으로 넘어가야 할 당위를 찾는다. 민족이나 시민이나 국민이란 개념을 역시 국가주의, 민족주의, 어떤 부분의 당파주의에 따르는 개념이며, 그러한 것들이 주도세력을 이루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것이 씨ᄋᆞᆯ이라는 개념이라 본다. 그것은 함석헌이 항상 주장하고 말하던 맨사람으로서의 씨ᄋᆞᆯ, 즉 나라와 민족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맨사람으로서의 씨ᄋᆞᆯ이 보편화될 때 이제까지 있었던 문제들이 해결될 실마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민족이나 시민이나 국민이라는 것들은 맨사람 씨ᄋᆞᆯ로 가는 길목의 개념들이라고 본다. 누구든 자기가 낳고 자란 민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매이지 말아애 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민족이란 것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출발점이면서 그것을 실현한 근거지만, 맨사람, 씨ᄋᆞᆯ로 극복되어 승화되어야 할 개념이다. 민족주의를 넘는 민족을 성실히 다질 때 허공에 떠 있지 않은 씨ᄋᆞᆯ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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