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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바보새 씨알학당 3강-<한국역사>는 지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 김상봉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8-03 22:24 조회170회 댓글0건

본문

바보새 씨알학당 제1기 인문학 강좌   

● 일 시 : 2011년 11월 18일-12월 2일(매주금요일) 오후 2~4:30
● 장 소 : 전북대학교 법과전문대학원 진수당 2층(바오로홀)
 

11월 25일 금요일 오후 2~4:30
3강 (역사 지성) <한국역사>는 지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 김상봉  


함석헌과 씨알 철학의 이념

 

【주제분류】철학론

【주요어】철학, 종교, 정치, 전체

【요약문】이 글은 함석헌의 철학개념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함석헌이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점점 더 많은 직업적 철학자들 사이에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그의 철학 개념이 가진 고유성 때문이다. 그 고유성은 한편에서는 오랜 것이고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이기도 한데, 그 낡음과 새로움의 공존이 한편에서는 그의 철학을 철학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했지만 동시에 점점 더 증대되는 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철학과 종교 정치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 셋이 모두 전체 또는 절대자와 만나고 이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존중하면서도 이 점에서 동양철학의 전통을 따른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단순한 이성의 일이 아니라 믿음의 일이기도 하며, 일면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기도 하다. 이처럼 철학과 종교 정치의 공속이야말로 함석헌 철학의 독보적인 고유성을 이루는 바, 또한 이 고유성이 그의 철학에 대한 무시와 관심을 같이 설명해주는 것이다.

 

1. 함석헌은 철학자인가?

함석헌이 철학자인가? 이것이 우리의 물음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함석헌은 여전히 주류 철학계의 관심 밖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의 강단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함석헌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많아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살펴보려 하는 것은 이런 무시와 관심의 근거이다. 어떤 의미에서 함석헌은 지금까지 주류 철학계에서 외면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점점 더 많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 두 가지 다른 물음에 대해 동시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함석헌에게서 철학이 무엇이며, 그의 철학의 이념이 어떤 의미에서 전통에 맞닿아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 낯설음과 새로움을 같이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철학의 대상-철학과 종교 사이에서

함석헌에게서 철학이란 무엇이었던가? 이 물음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아직 4·19의 감격이 채 가시기 전이었던 1961년 초 그가 새로 뽑힌 국토건설요원들 앞에서 행한 「생활철학」이라는 제목의 강의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철학이 따로가 아닙니다. 종교도 절대자를 찾는 것, 철학도 절대자를 찾는 것입니다. 철학을 따져 올라가면 믿음에 이르는 것이고, 반대로 참 믿음 있으면 반드시 철학이 나올 것입니다. 철학을 반대하는 종교, 아무 뜻 모르고 맹신하는 종교, 그것은 미신이고, 또 종교 반대하는 철학, 생명의 뚜렷한 빛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이론, 사색, 그것은 빈말뿐입니다. 오늘 지식인이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하고, 믿음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껍데기 지식이요, 참 지혜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 없기 때문에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의 철학이 우리들 사이에서 철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첫째가는, 가장 근본적인 까닭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서 “참 철학은 곧 종교”였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가 모두 절대자를 찾고, 이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함석헌은 절대자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전체’이다. 절대자는 다른 무엇보다 전체다. “진리는 언제나 전체에 있”고, “지혜도 전체에만 있”다. 그리하여 함석헌이 평생을 두고 추구했던 것은 전체와 만나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체를 지향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전체가 참이요, 전체가 선이요, 전체가 미다.”

하지만 이 전체라는 것은 삼라만상의 외적 집합체, 곧 “부분의 합한 것이 아니다.” “내용을 초과한 것이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모든 부분을 자기 속에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은 모든 부분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인 것이다. 그렇게 전체를 부분의 합 이상이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이다. 한갓 전부가 아닌 참된 전체는 언제나 하나인 전체 또는 전체인 하나이다. 그리하여 참이 전체이듯이 또한 “참은 하나다.” 여기서 하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하나 둘 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 수로 헬 수 없는 것이 하나다.”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하나, 그것 자신이 전체인 하나, 그것은 주체인 하나, 곧 ‘나’인 하나이다. “‘나는 나다’ 하는 이가 하나”인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함석헌은 “한 나”, “한 我”라고 불렀는데, 그가 그토록 자주 입에 올린 하나-님이란 이름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하나이자  나인 전체를 높여 부른 이름이었다.

철학이 현상의 부분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사유하는 한에서 다른 모든 과학과 구별된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부터 확립된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에 속한다. 그런 한에서 함석헌이 절대자인 전체를 추구했다는 것은 그의 사유가 철학의 전통에 굳게 뿌리 내리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많은 철학자들이 전체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사명이라고 믿는 우리 시대에 전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함석헌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 철학의 해체적 경향은 무슨 대단한 지혜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앓는 질병의 징후일 뿐이다. 함석헌은 일관되게 우리 시대의 “어지러움이란 다른 것 아니요, 전체를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결코 개인행동의 타락이나 어떤 제도의 깨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사회가 어지러워진 결과로 오는 것이다. 어지러움은 그보다도 전체의 산 통일이 깨지는 데서 온다.

전체의 산 통일이 깨졌다는 것은 더 이상 지금까지 통용되던 보편적 세계관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을 전체와의 산 관련 속에 정립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세계관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세계관이 거의 해체되어 버리고 새것은 아직 얼거리도 잡지 못한 때다.” 그리고 바로 이 “보편적 세계사상의 결핍, 이것이 현대가 당하는 비참의 원인”이라고 함석헌은 생각했다. 인류가 하나의 전체 속에서 조화롭게 만나지 못할 때, 남는 것은 경쟁과 내분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날 그 내분은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인류가 멸망을 면하려면 가슴 속에 하나의 세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세계의 통일성을 믿는 사상이 나와야 한다.” 그런즉 우리 시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새로운 정신적 종합을 통해 깨진 전체를 복원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것을 굳이 철학의 일로 한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체인 하나로서 절대자를 추구하는 것은 철학의 일인 동시에 종교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이란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우주적 전체와의 산 관련 안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종교는 통일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개인으로는 몸과 마음의 하나 됨, 하나로는 국민이 하나 됨, 우주적으로는 만물과 하나님이 하나 됨을 이루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처럼 궁극적인 전체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종교와 철학이 근본에서 다른 것이 아니다. 함석헌은 “본래 동양은 철학과 종교가 떨어진 것이 아니요, 하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서양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도 학문만은 아니”었음을 상기시켰다. “옛날은 어디나 철학과 종교는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철학과 종교의 공통적인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철학과 종교가 근본에서 하나라는 것은 그 둘의 운명 역시 따로 가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철학이 우리 시대에 새로이 전체로서의 세계를 열어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종교 역시 더 이상 하나의 전체를 종합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낡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 역시 생명을 다한 것이다. “기성 종교는 그대로 화석이 되어, 역사의 지층 속에 남고 말 것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그런 까닭에 함석헌은 세계의 통일성을 믿는 사상이 나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를 복원할 “새 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가 나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절의 첫 인용문에서 보았던 것처럼, 철학과 종교가 모두 전체인 하나의 지평을 개방하지 못하는 까닭은 근원에서 보자면 철학과 종교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삶 그 자체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분열을 그대로 두고 삶의 총체성을 회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철학이나 종교가 삶의 총체성을 복원하려 한다면, 먼저 철학과 종교의 분열부터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확신이었다. 이에 따라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해 온 일이 철학을 종교로 그리고 종교를 철학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의 철학을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고, 그의 종교를 종교인들에게는 종교가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던 결정적 이유이다. 근대 이후 철학과 종교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상식이 된 철학계에서 걸핏하면 하나님과 믿음을 입에 올리는 함석헌이 철학자로 대접받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에서 그의 믿음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 사이에서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까닭은 그의 믿음은 기독교가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순종과는 양립할 수 없는 자유로운 철학적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말하는 생활철학이 “믿음을 가져라, 믿어라!” 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바로 다음에 “어느 기성종교의 교도가 되란 말 아닙니다. 되지 마시오. 그것은 종교의 껍질이지 종교는 아닙니다.” 하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함석헌의 사상은 제도화된 철학계와 종교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새로운 철학인 만큼 새로운 신앙고백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철학도 종교도 함석헌을 자기들의 사상가로 확고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새로운 정신의 출현이 그렇듯이 함석헌의 사상 역시 거주할 집이 없다. 공중의 새에게도 둥지가 있고, 들의 여우에게도 굴이 있건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예수처럼, 함석헌도 어디도 머물지 않는 빈들의 정신이요, 거리의 철학이다. 애석해 할 일은 아니다. 땅위의 모든 낡은 집을 쓸어버리는 폭풍은 집이 없다. 오직 천하가 자기의 집인 것이다.

3. 철학의 방법-믿음과 이성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함석헌이 철학과 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다는 것을 밝혔으나, 그런 시도의 의도와 동기가 그것의 타당성까지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히 추궁하여 함석헌의 시도가 과연 타당한지 또는 그것이 실현가능한 시도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철학과 종교가 하나인 것은 함석헌에 따르면 다른 무엇보다 그 둘이 모두 절대자라는 하나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물음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단지 대상이 같다 해서 철학과 종교가 구별 없이 같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같은 절대자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찾아가는 길이 다르다면 철학과 종교는 정신의 상이한 활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즉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철학과 종교가 대상뿐만 아니라 그 길에서도 같은 것일 수 있는가, 또는 같은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번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를 철학의 관점에 국한하여, 철학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 동시에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함석헌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간단히 말해 철학은 이성의 길을 따라 절대자에게 나아가려 하지만, 종교는 믿음의 길을 따라 같은 곳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러나 믿음은 마지막에는 그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맹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종교는 안개 자욱한 믿음의 길이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길이라고 주장하는데, 계몽된 이성이 그런 믿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함석헌 역시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존하는 종교의 맹목 때문에 이성이 믿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이성의 몰락을 불러 온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성이 이성 이상을 인정하고 그리로 올라갈 생각을 하면 지켜갈 수도 있고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이성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을 인정치 않으면 그 이성조차도 못 지니고 짐승의 세계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함석헌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성 이상(以上)”, 다시 말해 이성의 피안은 이성이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니 그 자체로서는 이성이 무기력한 믿음의 영역을 뜻한다. 그러나 그 영역은 이성에 도달하지 못한 계몽 이전의 맹목적 의식세계가 아니라 이성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그러나 반드시 도달해야 할 지평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이성의 과거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이성의 미래를 향한 정신의 달음질이니, 그런즉 이성이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미래를 포기하고 지금을 지킬 수 있으면 그 또한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높이 날갯짓 하지 않는 새가 추락할 수밖에 없듯이,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오직 믿음으로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려 하지 않는 게으른 이성도 이성 이전으로 퇴행하고 전락하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이성이 이성다우려면 그것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성다움이란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칸트에게서 그랬듯이 함석헌의 경우에도 “이성이라는 이(理)는 곧 전체의 바탈”이다. “감정은 개체에 붙은 것”이지만, 이성은 전체를 생각하는 능력으로서, “전체의식 혹은 공공의식”을 통해 개별성에 집착하는 인간의 삶을 우주적 삶을 향해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전체를 추구하는 까닭은 오직 전체 속에서만 자기를 정립하고 주체로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가 중심이기도 하지만 또 전체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를 위협하는 때에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와 세계 사이에 산 관련이 있는 것을 안 후에, 즉 나와 세계가 하나인 것을 안 후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만나는 전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제약된 전체이다. 어제의 전체는 오늘은 부분이다. 절대적 전체는 변함없는 무제약자이지만, 현실 속의 전체는 생성되고 자라나는 전체인 것이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보다 더 큰 전체 속에서 실현해 가자는 것, 혹은 바꾸어서, 전체를 늘 확대돼가는 현실 속에서 실현하자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보다 더 큰 전체 속에서 인식하고 실현하는 능력, 자기를 전체와 매개하는 마음의 소질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 나를 전체와 묶어주기 위해 사용하는 끈이 바로 “까닭”이다. 이성의 셈과 헤아림은 까닭을 묻고 이유를 찾는 활동인바, 이를 통해 이성은 부분을 묶어 전체로 만드는 것이다.

까닭을 아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을 이성적 존재라 하지만 이(理)는 까닭이다. 까닭은 나를 뜻에 붙들어 매는 줄이다. 이른바 존재이유다. 부분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까닭이다. 그보다도 전체 속에서 자기로 자각케 하여 자아를 성립시키는 것이 이(理)다.

이성을 뜻하는 라틴어 라티오(ratio)는 그 말뜻부터 까닭이고 방법이다. 까닭을 묻는 것이 이성의 방법인 것이다. 이성은 까닭의 사다리를 통해서만 절대자인 전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머무르는 한 이성은 결코 절대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까닭이란 부분을 묶는 끈이지만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까닭을 통해 부분을 묶음으로써 전체를 지향하지만 절대자를 향한 마지막 도약 앞에서 언제나 좌절한다. 이성이 종합하는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서 만드는 것은 이성과 까닭의 피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전체를 만나려 한다면, 그것은 이성이 오직 자기를 초월할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다. 이성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믿음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이성의 곤경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몽된 시대에 도리어 믿음을 위해 이성을 제한할 것을 요구한 사람이 칸트였다. 그에 따르면 근거와 까닭이란 유한한 세계의 존재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종합하여 끊임없이 보다 더 큰 전체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이를 통해 절대자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유한한 세계, 현상의 자연을 넘어선 무제약적인 존재, 다시 말해 까닭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까닭의 그물을 통해서는 절대로 절대자를 포획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절대자와 만날 수 있는가? 칸트의 대답은 우리가 절대자를 인식할 수는 없어도 생각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인식을 넘어선 생각의 지평, 칸트에게는 그것이 믿음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의 영역을 도덕적 실천의 법칙을 통해 규제하려 했다. 절대자는 인식의 대상은 아니지만 우리는 신을 믿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선을 실천함으로써 신성한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 역시 단순한 인식의 철학자가 아니라 믿음의 철학자였다. 그리고 비단 칸트뿐만 아니라 그를 이어받은 독일관념론 철학자들 역시 나름대로 신앙의 기초를 철학적으로 근거지으려 했으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 모든 시도는 기독교의 몰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까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철학이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있는 절대자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의지만으로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또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의 대상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이 병들어 있다면 믿음 역시 병든 믿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세상을 구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칸트도 헤겔도 진지하게 신에 대한 믿음을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신이란 어쩔 수도 없이 낡고 구태의연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한 기독교의 신, 곧 그들 종족의 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녀사냥과 과학에 대한 박해, 제국주의적 침략과 아우슈비츠를 모두 목격한 우리 시대에 무신론이 철학자들의 교양이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함석헌은 바로 이 현대의 교양 이면의 퇴폐와 무기력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문명 비판적 차원에서, 현대사회의 위기가 낡은 전체를 대신할 새로운 전체, 참된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정신이 계몽된 이성을 빙자하여 전체를 믿음 속에서 정립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 오직 지혜가 믿음이 될 때만이 그것은 삶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는 차 안에 앉은 사람 모양으로 저들은 뻔히 알고서도 “내려간다! 내려간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지껄이건만 그것이 조금도 내리닫는 차 걸음 같은 이 나라의 빠져듦을 멈추지는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한개 의견이나 얘기이기 때문이다. 의견이란 뭐냐? 갈라진 생각이다. 본래 생각이란 갈라진 것이다. 그것이 삶의 힘이 되려면 믿음에까지 통일되어 변화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로 변한 생각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얘기이다. 얘기란 곧 하나님 곧 전체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요, 사람끼리 하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에 뛰어들어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는 용기 없는 것들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 곧 진리에 봉사하고 싶은 의기 없는 것들이 양심의 불안을 한 때 잊기 위하여 자위로 하는 관념의 장난이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일어나는 식욕을 참지 못해 간수보고 “먹을 것을 다오.” 하지는 못하고 저희끼리 모여 앉으면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으로 배는 조금도 불러지지 않는다. 생각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와야 한다. 증언은 곧 행동이다. 참말 함이다.

의견(doxa)이 갈라진 생각이란 것은 플라톤에게서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의견은 사사로운 생각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의견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인식(episteme)을 말했다. 함석헌이 에피스테메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인식을 말하지 않는다. 인식이란 까닭에 사로잡힌 생각이요, 이것으로는 궁극적 하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하나에까지 이르지 못할 때 철학은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인간의 눈먼 욕망이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학자들은 다만 “얘기”를 할 뿐이다. 얘기는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고 형성하지 못하는 담론, 곧 잡담과 수다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하는 얘기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잡담이거나 아니면 정신의 무기력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철학이 잡담과 변명으로 전락한 까닭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하나로 변한 생각이다. 생각이 하나로 변했다는 것은 생각이 전체인 하나 속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전체와 하나 될 때 생각은 세계를 형성하고 역사를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은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곳에 자기를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는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의 흐름에 뛰어들어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는 지극한 열정으로부터만 솟아날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생각은 사사로운 잡담이 아니라 공적인 증언이 되며, 역사를 움직이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함석헌의 말의 알아듣기에는 그들은 너무 계몽되었으며, 너무 많은 교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현대의 문턱에서 시대의 문을 열었던 니체는 “우리들은 전적으로 현실주의자들이며, 신앙도 미신도 갖고 있지 않다”고 뻐기는 교양인들을 가리켜 “생식의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라며 경멸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이라 보는 것, 그것은 인식이다. 그런즉 모든 인식은 현실적이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현실에 갇힌 자다. 그러나 없음 속에서 있음을 보는 것, 그것은 믿음이다. 그런즉 창조하는 자들은 믿어야 한다. 창조란 없는 데서 있게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할 수도, 잉태할 수도 없는 자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필요 없다. 그리하여 믿음 대신에 그들은 오직 현실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계몽된 이성과 교양을 자랑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다시 창조되고 잉태되지 못할 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만물의 죽음과 몰락밖에 없다. 그런즉 믿음이 사라진 곳에 남는 현실은, “모든 것은 멸망해야 한다”는 것, 이 하나뿐인 것이다. 그 멸망을 피하려면, 믿어야 한다. 이것은 니체의 외침이었지만 또한 함석헌의 대답이기도 했다.

믿음은 창조하는 힘입니다. 없다가 믿으면 또 있어집니다. 아닙니다. 믿음이 곧 있음입니다.

근본에서 보자면 바로 “그러한 믿음 그것을 세계관이라” 한다. 세계관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믿음 속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함석헌은 세계관의 관(觀)이란 글자를 이렇게 풀이한다.

본래 글자도 관(觀) 왼편에 있는 것은 올빼미인데, 그 위에 있는 것[口口]은 올빼미 눈이에요. 아래 있는 것은 새 추(隹)니까 새를 표시하고, 올빼미는 낮에는 못보고 어두운 데서 본다. 그래서 관이라는 것은 나타나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래 견(見)이 아니고 관(觀)입니다.

“사상도 여러 가지지만 그 여러 가지 생각이 종합이 되어 우주 인생에 대한 따짐은 해석이 되고 거기서 우리 살아가는 태도가 나오게 되면 그것이 세계관”이다. 까닭을 따지고, 뜻을 해석하고, 생각을 종합하여 마지막으로 실천적인 태도가 거기 결합되면 그것이 하나의 전체에 대한 통찰로서의 세계관인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바라보는 세계는 사물적 현실의 세계일 수 없다. 칸트가 말했듯이 전체로서의 세계는 언제나 이념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 오지 않은 세계의 이념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형성하려 한다. 그 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요, 보이지 않는 세계다. 철학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러나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정신의 활동이다. 그것을 가리켜 세계관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인 까닭에 믿음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세계관이요, 믿음이 철학인 것이다. 그런즉 이성이 철학의 기관이라면, 그것은 믿음 속에서만 완성된다.――“과일이 완전히 익으면 떨어지듯, 이성이 완전히 이성적이면, 스스로 자기를 절대자 앞에 바칩니다.”

4. 철학의 진리-만남과 뜻

철학은 믿음 속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믿음이 철학의 문제인 한 믿음의 진리가 문제된다. 믿음은 모두 참인가? 아니라면 믿음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참된 믿음이고 무엇이 거짓된 믿음인가? 이제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 물음은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주관적 활동으로서 믿음 자체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는 것이 과제이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종류의 활동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믿음의 활동이 지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둘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 일치의 의미와 가능근거를 물어야 한다. 진리는 일치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치는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진리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의 진리 또는 인식의 진리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진리, 믿음 속에서 발생하는 일치와 하나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먼저 분명한 것은 믿음은 나와 전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란 것이다. 그것이 철학과 종교에서 문제되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내가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이 나으리라고 믿는다거나 내가 파산했을 때 부자가 되리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거기서 내게 문제되는 것은 오직 나의 돈이나 건강이다. 내가 아무리 나의 돈과 건강을 하나님과 관계시킨다 하더라도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존재 전체가 아니다. 오직 나의 관심이 세계 전체에 있을 때 그런 믿음만이 철학이 말할 가치가 있는 믿음인 것이다.

그런 믿음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믿음은 믿음의 믿음 곧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다. 그것을 표현하여 함석헌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이라 한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의 근원적 일치에 대한 믿음이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인 까닭에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야말로 모든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으로서 믿음의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은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먼저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어떤 특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존재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곧 “우주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이라, 부처라, 브라만이라, 진리라, 생명이라, 이름은 가지가지로 불려져도 사실은 하나다.” 그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우주는 한 뜻의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는 다시 내 안에 있다. “그 전체는 실지로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내게, 곧 자아에 있다.” 그런즉 함석헌에게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만큼 또한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곧 “내 속에 무한을 믿음”이다.

나는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 듯 하지만 저 영원 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작지만 그 나타내는 전체, 그 밑, 그 뜻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긴 것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나의 두 차원을 같이 말하는데, 하나는 영원성과 무한성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과 개체성이다. 나는 본질에서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혼은 우주의 근본 되는 절대의 정신과 그 바탈이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현상에서는 그로부터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본질에서는 하나인 나와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는 이 끝과 저 끝으로 마주 서 있다. “하나님의 잡을 수 있는 이 끝이 ‘나’란 것이고, 나의 알 수 없는 저 끝이 하나님”이다. 하나가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자아의 그 두 차원이 하나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본질에서 보자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절대적 일치는 현실 속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지금 무제약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가 되어감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를 한 마디로 “하나님이 되잠”이라고 표현했다. 종교적 믿음이란 나와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그 동일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동일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자는 것이요, 종교적 믿음의 본질도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완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역사는 한편에서는 내가 하나님에까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요, 동시에 하나님이 나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자기 속에 품은 씨앗인 씨이라면, 반대로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은 다 된 하나님이 아니요 영원히 자라는 영원한 미완성”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신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거꾸로 신이 인간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마지막으로 이 두 겹의 역사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궁극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 이것이 함석헌의 믿음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것을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사실로 증명하려 했었더라면, 그의 역사철학이란 헤겔철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역사와 신의 역사가 하나라는 것을 객관적 필연성이 아니라 믿음의 과제로서 제시한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려는 것은 신이 역사를 주재한다는 상투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역사가 신과 인간의 만남, 나와 하나님의 만남 속에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나와 하나님이 만나지 못하는 한 나는 하나님을 향해 상승하지 못하며 하나님은 나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다. 오직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한에서만 나도 하나님도 역사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완성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를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 하기도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기록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찾는 기록”이라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에반젤린이 가브리엘을 찾듯,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리하여 함석헌에게서는 전체인 하나,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철학의 근본과제가 된다. 하나님은 단순히 앎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이든 생각이든 그런 구별 이전에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절대자를 한갓 앎의 대상으로 치부해왔다. 앎의 대상은 언제나 사물화되는 대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역시 앎의 대상인 한 이러저런 방식으로 규정되는 사물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 때 대상에 대한 인식은 대상을 오직 표상할 뿐이어서 나의 앎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상은 내 밖에 자립하는 타자로 머물 수밖에 없다. 앎은 결코 나를 대상이 되게 하거나 대상이 내가 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오직 내가 하나님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는 한에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하나님이 내가 되고 내가 하나님이 되는 진정한 일치가 일어난다. 이 일치 속에서 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며 하나님의 일은 또 내 일이 된다. 그리하여 내가 만드는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의 역사는 다시 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오로지 나와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나와 하나님의 일치를 만남에서 찾을 때, 진리의 개념에도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진리는 일치이다. 나와 하나님의 일치는 나와 다른 모든 사물의 일치에 앞서는 본래적 진리이다. 그런데 이 일치의 의미는 만남에 있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의 일치가 일어난다. 사물과 그것의 표상이 합치할 때, 표상이 사물이 되거나 사물이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한에서 그 일치는 파생적인 일치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 만날 때, 이 만남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내가 된다. 그런 한에서 이 일치는 파생적 일치가 아니라 본원적 일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내가 되는 것은 무한한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이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동경인바, 철학과 종교는 모두 이 동경에 이끌려 절대자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함석헌의 대답은 이것이다. 뜻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불성(佛性)을 믿습니까? 아니거든, 생명의 거룩함을 믿습니까? 하나하나의 몬(物)과 일은 다 그 거룩한 생명의 구체적인 자기표현임을 믿습니까? 모든 존재는 다 말씀하는 존재임을, 존재는 곧 말씀임을, 뜻임을 믿습니까? 말씀의 마디마디 속에 전체의 뜻이 다 들어 있음을 믿습니까? 믿는 줄 압니다.

뜻이란 존재가 하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말을 한다. 우리가 전체를 하나님이라 하든 불성이라 하든, 만물은 근원적인 생명의 구체적 자기표현이다. 아니 더 나아가 전체가 내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실현하는 한에서 그 전체는 적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나는 나’라고 하는 주체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자는 말하는 하나님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야 만다. 그러면 벌써 만물이다.” 만물은 말씀의 외화요, “모든 형상은 뜻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말씀이 하나의 절대자로부터 발화되는 한에서, 말씀의 마디마디에는 전체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뜻에서 나왔고 뜻으로 돼가고 뜻으로 돌아”가는 한에서, 우리는 뜻이 존재의 진리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은 이런 뜻의 존재론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표현했다.

뜻이 있음이요, 있음이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은 있음 그 자체, 곧 하나님이다. 또한 그것은 만물의 근거요 궁극적인 목적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그 뜻을 알아듣고 품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뜻을 품을 때 인간은 참된 의미의 인간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뜻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뜻, 그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뜻이 아무리 존재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 필연성으로서 미리 고정되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뜻은 나와 하나님의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다. 뜻을 품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지만, 동시에 사람이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 뜻은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의미란 것이 무슨 연극의 각본처럼 미리 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씨이 그렇게 역사를 붙잡아보는 것입니다. 붙잡는 것도 나요, 붙잡히는 것도 나입니다.

여기서 함석헌은 의미, 다시 말해 뜻이 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것이 결코 정해진 각본이 아니란 것을 말한 뒤에, 의미를 붙잡는 것도 붙잡히는 것도 나라고 말한다. 이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기투라는 것을 뜻한다. 나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역사 그 자체는 뜻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씨은 보이는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뜻을 붙잡아 낸다. 그런 한에서 뜻의 주인, 주체는 인간이다. 뜻을 뜻이 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함석헌은 이를 보다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운명과 천명을 구별한다.

운명과 천명이 불가항적인 데서는 같으나 그 뜻에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에는 의미가 없고 하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명이란 이 우주에 어떤 일관하는 의미가 있는 것을 믿는 말입니다. 믿음이기 때문에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허무입니다. … 천명인 담에는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미인 담에는 실현해서만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역사가 나옵니다. 운명이라면 몰라도 좋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 운명에는 맹목적인 복종이 있을 뿐이지만 천명은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되고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체가 내가 문제입니다. … 의미의 세계는 스스로 서는 세계입니다. 그 체험하는 주체에 따라 역사의 차이가 생깁니다.

천명과 운명이 모두 하늘의 일이지만 운명이란 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정해진 필연성이다. 그런 한에서 나는 그것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운명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한 객체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런 운명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운명론, 또는 숙명론이란 그가 일관되게 거부했던, 노예적 세계관이었다. 존재의 진리는 결코 소외된 필연성이 아니다. 도리어 의미의 세계는 스스로 서는 세계, 곧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세계이다. 그 까닭은 의미가 믿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믿는 것은 나다. 내가 믿으면 천명이지만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믿고 깨닫고 실현할 때 의미도 역사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천명에 대해 나는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으로 홀로주체로서 나의 일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뜻을 믿고 실현하는 나의 주체성은 고립된 홀로주체성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서로주체성이다. 즉 존재의 뜻과 의미는 나와 하나님의 자유로운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의미는 큰 일에서거나 작은 일에서거나, 오직 스스로 하는 씨의 마음과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영원불멸의 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뜻은 사람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홀로 이루는 것도 아니요, 사람이 저 혼자 만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씨의 마음과 영원불멸의 정신이 같이 이루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뜻은 오직 내가 하나님과 만날 때 비로소 드러나고 또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뜻을 존재의 진리라고 부른다면, 하나님과 나의 만남이야말로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고 또 실현되는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전체이니,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또한 뜻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그것이 믿음이다. 현상 너머에서 존재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은 나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믿음의 일이다. 내가 듣는다고 믿으면, 뜻이 있지만, 내가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 뜻은 믿음의 열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과 뜻과 믿음은 공속한다. 존재의 의미는 나와 하나님의 만남 속에서 드러나지만 그 만남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5. 씨의 철학-이론에서 실천으로

철학이 절대자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제 철학은 뜻을 찾는 생각의 활동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음으로써 철학의 한 시대를 열었다. 그 물음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물었던 것은 존재의 객관적 본질이었다. 각 존재자의 그 자체로 있음의 진리,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칸트가 인간에게 사물의 그 자체로서 있음이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한갓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뒤에 철학은 존재의 진리를 주어져 있음 또는 자기에 대하여 있음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함석헌의 생각을 따른다면 존재의 진리는 존재 그 자체의 객관적 본질에 있는 것도, 그것의 주관적 현상에 존립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진리는 뜻에 있는 바, 이 뜻이란 오직 나와 하나님의 만남 속에서만 나타나고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진리는 그것 자체에 있는 것도, 나 자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만남도 뜻도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존재는 말씀하는 존재지만 내가 듣지 못하면 모든 존재는 무의미한 침묵 속에 잠들어 있는 것과 같다. 몸의 귀에 들리지 않는 존재의 부름을 마음의 귀로 듣는 것, 그것은 세상 모든 일에서 뜻을 찾으려는 나의 믿음으로 가능해진다. 믿음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의지의 표현이니, 그런즉 믿음으로 열리는 뜻은 단순히 의미(meaning)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의지(will)이기도 하다. 우리가 존재 그 자체 속에 뜻이 객관적으로 담겨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나를 부르는 “절대적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부름을 오직 믿음의 귀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뜻은 나의 자유로운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그리하여 뜻이 존재의 진리라면, 진리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의지에 존립한다. 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만남 속에서 뜻은 드러나고 또 이루어지는바, 존재란 고정된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의지적 만남 속에서 뜻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인 것이다.

존재의 본질 곧 존재의 진리가 무시간적 과거(zeitlose Vergangenheit)에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오랜 철학적 확신이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진리가 무시간적 과거라는 말은 진리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에게서 존재의 진리는 의지에 존립하는 것이었던 만큼, 어제나 오늘이 아니라 내일의 일이었다.

참에서 있음이 나오지만 ‘있는’ 것이 참도 아니요, ‘있던’ 것이 참도 아니다.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이 정말 참이다. 시(始)가 종(終)을 낳는 것이 아니라 종(終)이 시(始)를 낳는다.

참에서 있음이 나온다는 말은 뜻에서 있음이 나온다는 말과 같다. 뜻이 참이기 때문이다. 뜻은 의지이다. 그러나 뜻은 있었던 것이나 지금 있는 것의 관념적 반영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향한 정신의 지향이요, 아직 있지 않는 것이 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한낱 헛된 소망으로 끝나지 않고 진리가 되려면 그것이 실현되어야만 한다. “진리는 실현해서만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뜻을 실현하는 자는 다시 나 자신이요, 또한 나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하나님이다. 그런즉 진리는 관념과 사실의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고 나 자신이 능동적으로 형성해나가는 역사에 있다. 믿음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때,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믿음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표상된 것이 실현되는 것,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철학은 낱낱의 일들의 뜻을 씨줄로 엮고, 있었던 것과 지금 있는 것과 있을 것 그리고 있어야 할 것을 날줄로 엮어 전체로서 세계를 하나의 뜻의 빛 아래서 조망할 때 비로소 존재를 하나인 전체로서 파악하게 된다. 세계관이란 그렇게 하나의 뜻 아래 파악된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뜻이 믿음 속에서 열리는 한에서 그 세계는 믿음의 세계이다. 그런 한에서 철학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서는 아직 진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인 것도 아니다. 철학은 자기가 믿는 뜻의 세계를 실현함으로써 뜻의 참됨을 확증한다.

그러나 철학이 학문과 이론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세계를 형성할 수도 없고, 세계 속에서 뜻을 실현할 수도 없다.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그 자체로서 뜻을 이루어가는 실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진리는 고립된 사변에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실천에 있다.

그 실천을 가리켜 함석헌은 혁명이라 불렀다. 혁명이란 명(命) 곧 천명(天命)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천명은 뜻이니, 뜻을 깨닫는 일도 새롭게 하는 일도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철학의 일이기도 하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철학의 일인 것이다. 이처럼 함석헌에게서 철학이 혁명의 기관(器官)인 한에서 그것은 단순히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정치란 통치행위도 아니고 단순히 권력획득을 위한 정당정치도 아니라,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고, 더불어 서로 주체로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만남의 공동체가 보다 확장되고 보다 깊어질수록 철학은 보다 더 성숙한 세계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만남을 매개하는 다리이다. 그것은 무한한 전체를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씨과 씨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 씨앗 속에 감추어진 세계를 현실 속에 펼쳐 내는 활동인 것이다. 함석헌은 그런 활동으로서의 철학을 “씨 철학”이라 불렀다.

씨 철학은 씨의 철학 곧 민중의 철학이다. 굳이 함석헌의 말을 빌릴 것도 없지만, “이날껏 민중이라면 구더기 같이 업신여기고 더럽게 안 것이 낡은 윤리와 사상의 특색이었다.” “소위 앞선다는 것은 민중에서 떨어짐이요, 소위 안다는 것은 씨을 모르노라 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높고 눈부신 철학 계시라 하더라도 따져보면 민중의 살림이 반사되어 허공에 걸린 무지개다.” 철학은 민중적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펼쳐진 꿈과 동경일 때 마찬가지로 민중적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 반대로 철학이 민중으로부터 소외된 지혜로 머무는 한, 그것은 세계를 형성할 수 없고 결국 자기의 진리를 확증할 수도 없다. 그 때 철학은 현실에서 소외된 정신의 넋두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추구하는 믿음이나 사상이 아무리 고매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믿음, 그 사상이 정말 큰 것, 정말 높은 것, 정말 성한 것이 되려면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 이래 철학이 꿈꾸어왔던 상승의 욕구가 전도되어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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