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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 바보새 씨알학당 -제4강 함석헌의 시와 사상/김성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8-03 22:22 조회133회 댓글0건

본문

제3기 바보새 씨알학당 <한신대학> 



주제; 함석헌의 시를 통해 본 씨알사상
기간; 2011년 11월 1일(화), 12월 7일(수) 4-6시
장소; 한신대학교 오산 캠퍼스 60주년기념관 국제강의실(18517)
강사; 씨알사상연구원(김경재, 김조년, 김성수, 최정윤)



함석헌의 시와 사상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함석헌은 누구인가?

20세기 한국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격동의 삶을 살다 간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 중에 함석헌(1901-1989)이라는 한 인물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89년의 생애 중 약10년 정도의 교사생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삶을 ‘탈북자’, ‘비정규직노동자’, 심지어 ‘백수’에 가까운 생애를 살고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을 사회 범주적으로 이렇게 규정짓고 나면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자기수준만큼만 타인, 사물 혹은 예술을 이해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함석헌에 대해 이 사회의 원로 혹은 명사 중엔 그를 좀 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예는 종교사상가, 평화주의자, 민주화운동가, 인권운동가 등이다. 함석헌이 전 생애를 통해 국가폭력과 독재 권력에 저항할 때에도 그는 비폭력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함석헌은 ‘한국의 양심’ 이나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순진 하리 만치 비폭력무저항운동에 앞장선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2세를 존경하였다. 1980년 대 20대 나이였던 내 방벽은 온통 함석헌의 사진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그런 내가 쌍문동 함석헌의 집을 방문하고 놀랐던 것은 80이 넘은 그의 방에는 언제나 간디와 킹목사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폭력무저항과 평화주의를 그의 삶에 한 원칙으로 너무도 중요시해서인지 군사정권시절의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로부터 ‘독설가’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1979년과 1984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서구 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제강점 하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가폭력과 독재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기에 함석헌은 수감, 가택연금 등의 생활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겪어야만 했다. 사회복지가 전무한 시절에 그래서 함석헌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하고 걸었던 길은 그래서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도 함석헌은 시를 쓰고 출판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소위 시인으로 ‘데뷔’를 한 것은 아주 늦은 편인데 그것은 함석헌의 나이 마흔 다섯인 1946년이다.

 

마흔 다섯에 데뷔한 시인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늦깎이 나이에 함석헌은 시를 쓰게 된 것일까? 그 사연은 아주 슬프고 참혹하다. 1945년 11월 23일 일어난 신의주학생의거 당시 함석헌은 인민위원회 문교부장이었다. 비록 그자신이 학생의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민주진영의 기독교 측 이사였기에 그는 소련군정 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시각엔 기독교인이란 곧 미국선교사들과 가까운, 친미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함석헌은 신의주학생의거에 책임자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체포즉시 현장에서 옷이 찢어지고 정신을 잃도록 심한 몰매를 맞았다. 소련군의 총칼 앞에 죽음의 문 앞까지 간 함석헌은 곧 어두운 감방의 철장 안에 갇히게 된다. 동시에 소련군대는 함석헌의 집과 재산도 압수했다. 그러므로 서 함석헌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일곱 명의 자녀들은 곧 절대빈곤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할 상황에 처해졌던 것이다.

신의주학생의거를 배후조종하거나 교사(敎唆)하였다는 죄목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민족진영의 간부 및 종교인들이 체포·구금되어 시베리아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은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일제강점기 36년을 참고 견딘 후 조국이 해방되었는데 해방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독립운동가, 애국자가 또 감옥에 들어가니 어찌 그의 슬픔과 기막힘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과 당장 눈앞의 생계가 막막한 노모와 처자들을 버려두고 비좁고 어두운 감옥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앞일을 생각하자니 그는 한숨과 분노,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책도 볼 수 없고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옥중생활에 그래서 함석헌은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 이 그가 늦은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된 경유이다.

이제 대책 없는 가장으로서의 외부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그는 어떻게든 절망감을 극복하고자 분투했을 것이다. “조국은 해방되었는데 난 왜 아직도 감옥에 있나?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그는 수십 수백 번 자문했을 것이다. 이런 혼미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교도관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직설적인 글보다는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시로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함석헌은 불가피하게 ‘시인’이 된 셈이다. 이런 혼돈과 절망감의 와중에서 시를 쓰기 시작해서 그런지 함석헌은 자신의 시를 놓고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체험을 겪으면서 ‘등단’한 시인으로서의 그의 ‘감회’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다....

그 내가 감히 씨를 쓰다니,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한 것이 아니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시인으로서 그의 감회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비참하다시피 한 한국역사 속에서 그는 시인의 되고픈 꿈과 여유조차 가져 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어느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집중해서 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한 소용돌이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자신이 ‘시인’ 인가 아닌가는 그래서 전혀 중요했던 것 같지 않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보다 근본적인 존재인 절대자(‘님’)와의 교감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시인으로서 ‘취임사’가 이렇게 ‘자포자기’식 한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 볼 몇몇 함석헌의 시들은 절대자 앞에선 한 연약한 인간의 차분한 느낌과, 보편적 진리 혹은 삶에 담긴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강렬하고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함석헌의 시는 일독할 가치가 있다. 감옥에서 이렇게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쓴 그의 시들은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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