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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 바보새 씨알학당 -제2강 함석헌의 시와 수필 <인생은 갈대>를 통해 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최정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8-03 22:21 조회275회 댓글0건

본문

제3기 바보새 씨알학당 <한신대학> 



주제; 함석헌의 시를 통해 본 씨알사상
기간; 2011년 11월 1일(화), 12월 7일(수) 4-6시
장소; 한신대학교 오산 캠퍼스 60주년기념관 국제강의실(18517)
강사; 씨알사상연구원(김경재, 김조년, 김성수, 최정윤

 

함석헌의 시와 수필 <인생은 갈대>를 통해 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최정윤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 순 날카론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잔 맘 하늘에 달 듯하건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거친 들 저문 날에 외로운 길손보고
풀어진 머리 흔들어 ‘가지 마소’ 하는 듯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 듯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나리어
파리고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다 좋고나 하는 듯 

인생은 꺽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1947. 7 함석헌)

   

인생은 갈대 -<進學>. 제9권 5호(1973년 7월)-   

갈대, 갈 때, 갈 데 

나는 일찍이 <인생은 갈대>라는 노래를 부른 일이 있다. 그것은 나와 남의 살아가는 일을 생각해 보아서, 사람의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어림, 젊음, 일함, 찾음, 깨달음, 날아올라감의 여섯 토막으로 나눠서 그 뜻을 씹어본 것이다. 

내가 그것을 읊조릴 때는 6.25전쟁으로 인해 바람에 밀리는 마름처럼 밀려내려가서, 운명은 하늘과 전쟁에 맡겨놓고, 날마다 시름 속에서 낙동강 가 흐느적이는 갈대만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육신의 운명은 돼가는 대로, 밖의 일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속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름이요, 그래서 읊조림이다. 

이제 20년이 지나갔다. 나는 더 늙었고 세상은 그때보다도 어는 의미로는 더 답답해졌다. 이 노래를 다시 한 번 인생이 한창인 학생들과 같이 되씹어보고 싶다.

제목은 물론 저 유명한 파스칼의 말에서 나왔다. 

인생은 갈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갈대라는 말은 약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세상 흔히 돌아가는 노래가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은...... 

하는 것도 그 뜻에서요, 예수가 그 제자들을 보고 영대(靈臺)를 그냥 두지 않는 어조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빈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흐느적이는 갈대냐
그렇지 않음 예언자냐 [<마태복음>, 11:8] 

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그 힘없이 연약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약하지만 또 약하지 않은 데가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힘으로 인해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힘을 갈대라는 내 속에 보려고 했다. 갈대를 실지로 발음할 때는 ‘갈때’로 하는데 그 때를 시(時)에다 걸어두고 인생은 갈 때다. 사람은 살다가는 갈 때가 있는 것이요, 그 갈 때를 생각하는, 밖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는 힘이 나온대서다. 

또 갈대는 갈 데라는 발음과도 가깝다. ‘데’라면 곳을 표시한다. 인생은 갈 데, 갈 곳, 곧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생각하는 데서 또 힘이 나온다. 대는 본래 힘이다. 꼿꼿하게 서는 것, 버티는 것, 올바른 것,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대 바른 사람’ ‘대가 센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어림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 순 날카론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어린 때의 의미는 그 생기, 원기에 있다는 말이다. 이른 봄 바닷가에 나가보면 연한 갈 순이 날카로운 창끝같이 기운차게 돋아난다. 그것은 마치 자기네가 서 있는 그 바다의 노한 물결을 단숨에 무찔러버리려 하기나 하는 듯하다. 그 날카로운 긑에 그 뜻이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하다. 인생도 그렇다. 세상은 험하지만 어린 마음은 산 기운이 넘치기 때문에 겁낼 줄도 물러갈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나선다. 

젊음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잔 맘 하늘에 달 듯하건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그 다음 청년 시대다. 갈이 자라서 대가 서고 잎이 무성할 때는 여름이다. 비가 오고 폭풍이 부는 때다. 그 갈대의 기운찬 모습을 보면 하늘에도 닿을 듯하지만 사나운 비바람이 치니 견디기 어려워 우수수 소리를 내며 떨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람이 젊을 때는 아직 분명히 의식은 되지 않으나 자기를 무한히 발전시켜 위대해지자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속에서 치솟고 있다. 그러나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위험, 유혹 때문에 그 깊은 속의 뜻대로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번민에 떤다. 그 모양이 마치 여름날 폭풍에 흔들리는 갈대 같다. 

떠는 잎 한데 얽혔다는 것은 아직 자기와 역사와 우주의 뜻을 깨닫지 못해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고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년 시절의 즐거움은 어디로 가고 이제 인생은 인생은 문제다.

일함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거친 들 저문 날에 외로운 길손보고
풀어진 머리 흔들어 ‘가지 마소’ 하는 듯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이 될 무렵은 갈대도 자랄 대로 다 자라고 그 꽃이 핀다. 그 누런 갈꽃이 고개를 수굿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 마치 장년기에 든 사람이 사업에 열중하지만 벌써 인생에 지쳐서 갈 곳을 몰라하며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바람에 휘적휘적이라는 데 세속주의 에 휩쓸린 모양이 있고, 그렇게 되면 벌써 인생의 마지막이 내다뵈는 듯해서, 저녁 때 빈 들에 서는 갈대같이 누가 이 앞으로 가는 길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앞으로 나간대야 이런 거친 들뿐이다. 가지 마라 하게 되는 것과 같다. 풀어진 머리란 갈꽃이다. 피어 풀어진 것이 장년기 사업에 지친 사람의 생각이 풀어진 것과 같음을 말한다. 

찾음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 듯
 
가을이 되면 그 곧추섰던 갈대도 그만 구부러져 누런 갈품이 물에 닿게 된다. 그 모양이 쓸쓸하다. 사람이 나이 60이나 되면 젊어서 품었던 이상도 다 잃어버리고 세속주의에 완전히 굴복해서 돈 벌어야겠더라, 세력 있어야겠더라 하는 것 마치 그 갈꽃이 다 흐린 물에 닿아 구부리고 있는 것과 같다.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라는 데 완전히 현실주의의 종이 돼버린 모습이 있다. 그러나 바람이 한 번 휙 불어 그 꾸부렸던 갈대가 다시 꿋꿋이 일어설 수가 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선다. 

인생도 그렇다. 아무리 현실주의에 종이 되어 이상이고 정신이고 다 잃어버려도 사람인 담에는 그 속에는 역시 영원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자는 그 본성의 요구가 남아 있다. 다만 잠을 자고 있을 뿐이요 질식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 무슨 종교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혹은 남의 훌륭한 사실을 보아, 또 혹은 시대의 외침으로 인해 정신이 깨게 된다. 그래서 이때까지의 돈과 권력의 세속주의가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고 다시 하늘을 우러러 일어서게 된다. 

여기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선다고 하는 데가 가장 중요한 데다. 이것을 해서 반성이 생기면 사람이고 못하면 그저 짐승처럼 썩는 것이다. 여기가 갈림 대목이다. 

깨달음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나리어
파리고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다 좋고나 하는 듯 

생각하면 깨닫게 된다. 깨닫고 보면 인생관이 달라진다. 세속주의에서는 잘 먹고 잘 입고 명예를 누리며 권세를 휘두르고 살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생의 인생 된 참 모습을 깨닫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떨어져나간다. 그것이 마치 초겨울 갈대 같다. 그래서 마른 갈대라고 했다. 말라버리면 꽃도 떨어지고 잎도 내리고 몸은 가늘어지고 속이 텅 비게 된다. 욕심을 버린 사람도 그렇다. 파리하고 비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면 속이 뚫려서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가 뭔가? 상대적인 모든 차별에서 초월한 것이다. 그것을 쓰고 단 맛을 다 좋아한다는 말로 표시했다.

보통 사람은 단 것은 좋고 쓴 것은 싫어 한다. 그러나 참을 깨닫고 나면 그 쓴 것 단 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쓴 것도 좋다, 단 것도 좋다. 다시 말하면 성공이니 실패니 명예니 욕이니 하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지경에 간다. 사람의 어려움은 결국 밖에서 오는 자극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안이 있다. 그 평안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솟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고 참이다. 그러므로 참 기쁨이다. 보통 사람은 맛에 살려 한다. 그래서 툭하면 “그건 무슨 맛에...”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정말은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뜻에 산다. 어떤 보람에 산다. 보람을 느끼기만 하면 굶고 헐벗어도 즐거움을 느낀다. 죽어도 즐거워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향락의 조건을 다 가지면서도 자기 사는 일에 보람을 못 느끼면 향락 속에 있어서도 슬프고 외롭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은 참 인생이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다는 말이다. 

날아올라감 

인생은 꺽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그러나 아무리 깨달아도 사람은 나중에 죽고야 만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 종교니 정신의 수양이니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이기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식, 깨달음을 가졌어도 결국 허망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럼 어떻게 죽음을 이길까? 

꺽인 갈대란 말은 죽음을 의미한 것이다. 갈대는 결국은 꺽어지고야 마는 모양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고야 만다. 예로부터 약으로 혹은 무슨 술로 죽음을 면하고 영원히 살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실패다. 사람은 다 죽고야 만다는 것은 과학적인 철칙이다. 이것을 어찌 하나? 

꺽어진 갈대를 어떻게 할까? 그것으로 피리를 하나 만들자는 말이다. 한 토막 뚫린 피리란 그것이다. 한 토막이다. 유한한 인생이다. 사람의 몸이 영원할 수는 없다. 전환을 해야 한다. 갈대로 영원을 얻을 수 없지만 음악이 되면 영원하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는 것을 불행으로 알지 말고 그것으로 하나의 음악적인 정신을 만들잔 말이다. 음악 소리를 내려면 속을 다 쑤셔내서 뚫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 죽음을 그 하나 쑤셔내는 작업으로 알자는 말이다. 죽으면 허망하다는 것은 갈대대로 영원히 있자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생명은 변화하여 한 단 더 높은 데 올라야 한다. 자라야 생명이다. 소년은 청년 되고 청년은 노년 되고 노년은 죽음 되지만 죽음은 정신화하여야 한다. 

갈대 통을 뚫으면 피리가 된다. 사람이 죽어 모든 육체적인 것이 소제되면 영원 무한한 것이 그것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면 음악이 나온다. 거룩한 숨을 마신다는 말은 그래서 했다.

사람의 나는 나대로 길이길이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영원한 것, 절대의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공기가 나가면서 진동이 되어야 음악이 나올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그 속으로 영원의 숨이 지나가야 참 생명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래서 높은 봉 구름 위라고 했다. 갈대 통이 비면 바람이 저절로 그곳으로 나가며 소리를 내듯이, 우리가 죽음을 잘 받아들여 우리 속을 깨끗이 비게 하면 자연 거기서 영의 음이 흘러나오게 된다. 그것은 영원한 음악이다. 하늘 곧 영원 무한에서 영원 무한으로 흐르는 노래다. 예수도 한 곡조 음이요 석가도 한 곡조 음악이다. 나의 이 노래는 그 영원한 노래의 한 연습이다.

연습을 잘해서 저절로 할 수 있게 되면 날아올라가는 시간이 온다. 그때에 죽음은 슬픈 듯 하면서도 즐거운 것이다. 처량이란 그런 뜻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다 무한히 높은 지경으로 영원히 날아올라가잔 것이다. 아직 날카론 창끝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 바다를 기운차게 대하고, 떠는 잎이 한데 얽혀 울며 싸우는 데에도 미리미리 이 영원한 목표를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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