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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 김경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8-03 21:59 조회283회 댓글0건

본문

제목; 우주는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 함석헌의 시 '우주' 감상
저자; 김경재
책명; 씨알의 소리. 2010, 1-2.


우주는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김경재

                           우 주
                           - 작시연대 1950년.  『함석헌 저작집』23권, 601-602쪽(한길사, 2009)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波動)
                점(点) 모여 선(線),
                선(線) 모여 면(面),
                면(面) 모여 체(體),
                체(體)는 하나

                한(큰) 체(體) 쪼개어 빛나는 면(面) 있고,
                넓은 면(面) 꺾여서 곧은 선(線) 있고,
                긴 선(線) 잘라서 묘(妙)한 점(点) 있으니,
                전체(全體)를 나타내는 것은 일점(一點) 이더라

                하나님의 (볼 수 없는) 몸
                만물의 (만질 수 없는) 면(面)
                도리의 (걸을 수 없는) 선(線)
                맘의 (알 수 없는) 일점(一点)
                하나님은 일점심(一点心)이니

                그 일점(一点)  안에
                또 몸 있고
                또 면(面) 있고
                또 선(線) 있고  
                또 점(点) 있으며
                또 그 점(点) 안에 또 그러하니
                이루 알 수  없는 우주(宇宙)

형이상학적 사색을 시로서 표현


  시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우주’라는 시제(詩題) 자체가 일상을 넘어서는 웅장함과 궁금증과 경외감과 사람의 외소감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한다. 1950년이 이 시를 쓴 해라고 표식 되었다. 1950년은 한국동란의 와중인데, 동중정(動中靜) 이라고 하듯이 온 산하가 포성과 아비규환으로 들끓고 있을 때, 우리의 시인은 우주와 전체와 하나님과 먼지같은 일점(一点) 인간생명을 사색했는지 모를 일이다.
  함석헌의 시들은 다양한 색향을 내는 문학작품 이면서도, 일반적 시작품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깊다면 깊은 맛을 내고, 어렵다면 무거운 감을 자아내는 철학적 시들이 많다. 그에게 있어서는 감정으로 느끼는 일과 정신으로 생각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불가분리적으로 함께가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한 정서적 감상을 노래하는 서정시들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대표적 시작품으로 꼽히는 「맘」이라는 작품에서 보듯이 뛰어난 감성적 언어구사를 통해서, 심원한 지성적 사색의 결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낸다. 예들면 「맘」의 첫부분과 끝부분의 4행씩만을 회상하면 충분 할 것이다.

  
맘은 꽃 / 골짜기 피는 난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을 토해.
  ..................
  맘은 씨알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골짜기 바위틈에 피어난 싱싱한 난초의 꽃잎들이, 퇴비 썩어 조성된 유기질 흙속에 뿌리를 박고 양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워낸다는 식물생장 이론을 노래하려는 것이 아니다.  식물이 자라면,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고 꽃과 잎을 스스로 다 떨어뜨린 후 옹근 씨앗을 맺는다는 생물체의 번식본능을 노래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사람이라는 영물의 사회문화적 의존성과 정신적 존재인 인간의 해석학적 삶의 방식을 골짜기 난초의 보라색 꽃잎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나의 개체 생명 안에, 나의 조상과 나의 민족과 전체인류의 역사적 삶 알짬이 응축되어 있음을 자각시킨다. 개체생명의 존귀함과 미래생명으로 바통받아 전달해 줘야할  숭고한 의무를 지닌 존재임을 다시한번 각성시키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려는 「우주」라는 작품도 우주천문학이나 물리화학법칙을 반추하려는 것도 아니고, 대자연 우주의 생성변화에 관한 종교철학적 교설(敎說)을 소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자의식은 매우 실존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주 대자연에서 볼 때, 국가나 개인이나 모두 한 점에 불과한 존재인데 왜 아웅다웅 싸우고, 지지고 볶으고 물어뜯으면서 전쟁과 정쟁 속에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묻고 있다. 시 제목은 「우주」이지만 알 수 없는 사람 맘의 일점(一点)의 존재이유와 존재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시는 형이상학적 사색의 결실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주와 생명은 ‘하나’가 드러내는 뜻의 파동(波動)

  「우주」라고 시제가 붙여저 있고 시의 운율 또한  다소 딱딱한 감이 드는 오늘 감상하려는 작품 속에는 함석헌의 실재관이 반영되어 있다. 마치 구약성경의 맨 첫권 창세기의  첫구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다”(창1:1)라는 신앙적 선언이 헤브라이즘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종교의 근본신앙고백을 천명하듯이 작품 「우주」의 첫연 첫 구절은 함석헌의 실재관이 선포되어 있다: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이라는 첫구절이 그것이다.
  우선 ‘파동’이라는 단어가 역동적으로 들린다. 빛의 이중성만이 아니라, 모든 물체가 본질적으로 입자와 파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전제가 되고 있음을 우리가 중고등학교시절 다 배운 바이다. 그러나, 전자 크기보다는 어마어마하게 큰  거대몸집을 지니고 자동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며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손으로 만지면서 고르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물질의 파동성을 쉽게 감득하지 못한다. 텔레비전, 핸드폰, 전자현미경, 인터넷등 양자물리학의 혁명이후 발전한 전자제품 문명이기(文明利器)를 날마다 사용하며 살면서도, 우리들의 사고구조와 생각방식은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에 지배되면서 산다. 우리는 물질의 입자성을 더 쉽게 이해한다. 물질의 입자성이 집적(集積)되면 원자현상, 분자현상, 물질현상이 나타난다고 쉽게 이해한다.
  고대철학자들의 사유체계가 시작된 이후, ‘실재’를 정태적 ‘존재’(Being)로 볼 것인가  역동적 ‘생성’(Becoming)으로 볼 것인가의 견해차이가 항상 있어왔다. 현대물리학이 도달한 결론 곧 모든 물체(물질)는 입자성과 파동성의 두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결론이 났으니, 이를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비유한다면 ‘실재’는 존재이면서 생성이며, 불변적 면이 있으면서도  항상 변하는 가변적 역동성을 갖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함석헌도 과학을 사랑하는 사상가였으니 그러한 물질의 양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철학은 정태적 존재보다는 역동적 생성을 중요시했고, 생명의 특징은 ‘되풀이와 자람’이라고 보았다. 단순한 물리법칙에 의한 무한한 반복운동만이 아니라,  새로움을 짓고 향유하며 모험하는 생명의 ‘미완성’의 정열을 노래했다. 그의  작품 「미완성」에 나타나는 다음 한구절이 인상 깊다:

           
 자연은 언제나 완성 할 줄 모르는 영감(靈感)의 거장(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줄 모르는 절대의 의지(意志)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시인은 우주를 ‘파동’이라는 어휘로서 역동적으로 이해하지만, 단순히 물리적 파동으로서 만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이라는 노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구는 ‘제대로 노는 뜻’이라는 형용구절이다. 세 개의 단어가 연속되었는데 각각 단어가 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대로’라는 단어는  무질서나 혼돈이나 추함의 반대의미를 지닌다.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 할 때는 음악작품이나 미술작품이 일정한 형식과 형태를 지니면서도  자유로움과 아름다움과 질서가 주는 밝음을 명시한다.
 ‘노는’이라는 단어는 한가한 ‘놀이’를 연상케 한다기보다는 더 깊은 뜻을 말하려고 한다.  놀이와 문화에 관한 고전적 연구서인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에서 잘 설명해주듯이, ‘놀이’는 의무와 필연성과 실용성을 따지지 않는 창조적 자유를 강조한다. 우주의 발생과 출현은 우연과 물리화학적 법칙의 기계적 운동결과가 아니고, 창조의 기쁨과 자유의 모험의 결과라는 믿음의 고백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뜻’이라는 우리말 어휘는 ‘의지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묘한 단어이다.  『뜻으로 본한국역사 』라는 책제목에서도 ‘뜻으로 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제대로 이해함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 신이 미리 결정한 섭리사관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주관적 이념의 투사행위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와 같은 미립자세계에서는 파동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다시말하면 존재할 경향 또는 존재할 확률만을 지닌 상태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어느 과학자에 의해 관찰되는  순간 ‘존재’를 얻게 된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역사해석 또한  역사 의미를 알아차리고 의미있는 과정으로  바라보며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면서 역사를 짓는 자에게 역사는 뜻있는 것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시인은 우주를 노래하되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이라는 첫구절로 시작하여 그의 사상의 전체를 집약한 형이상학적 실재관의 표현이다. 시인이 누차 강조하듯이 우주는 여전히 신비이고, 인간이 그 비밀과 높이와 깊이를 다 파헤쳐 알 수는 없지만, ‘우연과 필연’(쟈크 모노)이 지배하는 무의미하고 냉혹한 물질적 기계세계가 아니라 ‘의지와 의미’가 점증해가고 형상화해가고 구체화해가는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체(體)는 하나, 전체는 일점(一點), 하나님은 일점심(一点心)

  우리의 시인은 우주의 역동적 변화를 기하학적 혹은 수학적 차원의 위상변화(位相變化)를 통해 그 유기체적 관계성과 중층적(重層的) 내포성을 노래한다. 점,선,면과 입체는 마치 150억년전 ‘우주빅뱅’이후  확장되어가는 우주를 노래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하나의 개체 안에 전체가 있어서, 개체와 전체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화엄사상에서 ‘한 티끌 안에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는  기본사상은 불교적 실재관의 핵심인 인연생기설 (因緣生起說)의 동아시아적 불교사상의  꽃핌이다.
  시인은 우주란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인데, 점과 선과 면과 체(體)로서 상징하는 천태만상을 현상적으로 드러내지만, 그 우주적 몸체는 ‘하나’이며, 이 ‘하나’를 종교적으로 말하면 ‘일점심 하나님’이요, 개인으로 말하면 개인의  맘의 알수 없는 맘의 지성소 일점(一点)이라고 노래한다.
  시인 함석헌은 어디에서 은유적으로 말하기를, 성경의 창세기 ‘에덴동산 타락설화’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범죄하고 지혜의 눈이 밝아졌다는 설화의 상징성을  물질계의 최종비밀 곧 원자구조의 해명에 해당한다고 해설한바 있다. 함선생이 아직도 살아계셨다면 물리학계의 ‘원자구조’ 해명보다도 못지않게 생물학계의 ‘유전자분자구조’ 해명을 중요시 했을 것이다. 창세기 설화가 말하려는  진실은 인간은 그 자기초월능력의 정신이 피 할수 없는 호기심, 탐험심, 지식욕, 휴브리스(교만심) 때문에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자신의 벌거벗음과 죄책감을 알고 느끼는 ‘성인’으로 누구나 모두 전이(轉移)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함석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천진난만한 에덴의 순진함’을 포기하고 실존적 자유의지의 권리주장을 통해서 ‘성인’(成人)이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몸을 볼 수 없고, 만물의 면(面)은 만질 수 없고, 도리(道理)의 선(線)은  걸을 수 없는 제한된 존재,  유한한 존재, 상대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진정한 성인(成人)’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한다.
  우주와 생명은 알 수 있는 면보다 훨씬 깊은 ‘알수 없는 우주’로서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경외를 느끼는 것이며, 티끌같은 존재이지만 내 개체안에 우주와 전체와 하나님이 관계되고 내포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지혜가 곁드린 믿음과 감사가 생길 기회를 얻는다.
  시인의 위대한 시심을 해석하는 자의 그릇이 작은 옹기그릇만하기 때문에, 제그릇 만큼의 의미만을 이해할 뿐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세계의 엄숙한 이법인 것이다. 진리를 돈으로 살수 있고 권력으로 독점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러나 염려 할 것 없다. 씨알이 자신의 마음 속에 맑고 밝은 그릇만 지니고 있다면, 권력자나 돈많은 재벌이 가질 수 없는 진리를 갖되 밭두렁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한 농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2010.1월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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