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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붓 꺾은 전두환, <씨알의소리>가 남았다면..." [인터뷰 ] <씨알의소리 > 주간 박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8-04-09 12:48 조회51회 댓글0건

본문

함석헌 붓 꺾은 전두환, <씨알의소리>가 남았다면..."

[인터뷰 ] <씨알의소리 > 주간 박선균 목사 (오마이뉴스)

18.04.09 08:03l최종 업데이트 18.04.09 08:03l

 

 

함석헌(1901-1989)은 4.19혁명 10돌을 맞은 지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박정희 정권 하의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갔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야만의 시대에 그는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이라는 일념으로 "돈도 되지 않는 잡지를 사재를 털어서" 시작했다.

그러나 <씨알의소리>는 1호를 내자마자 곧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강제 폐간을 당한다. 그 후 함석헌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3개월 만에 승소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씨알의소리>는 폐간과 복간을 거듭한다.

오는 4월 19일은 <씨알의소리> 창간 48주년이다. 그동안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는 장준하, 안병무, 이태영, 이병린, 송건호, 법정, 천관우, 김동길, 김용준 등이 있었다. 박선균(1938- )목사는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씨알의소리>의 발간 업무를 일선에서 담당하다고 모진 고난과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함석헌의 생존 시절부터 <씨알의소리>의 수난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런 박선균 목사가 오는 4월 19일 <씨알의 소리> 창간 48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한다. 그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57년으로 벌써 61년이 된다. 지난 60평생 오로지 외길만을 걸어온 박목사와 지난 한 달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오른쪽 박선균
 오른쪽 박선균
ⓒ 박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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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풀이다!' 그 말에 꽂혔고, 큰 용기를 받았다"

- 고등학교 재학 중인 지난 1957년 장준하(1918-1975) 선생의 잡지 <사상계> 3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을 처음 접하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나는 1956년도에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쪽지 한 장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운 좋게도 혜화동에 있는 상이군인정양원이라는 곳에서 말단 직원으로 심부름을 하면서 야간 고교를 다닐 때였다.

하루는 선배의 책상에 꽂혀있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봤다. 그것을 펼쳐보니 글이 모두 한문 투성이인데 유일하게 함 선생님의 '할 말이 있다'는 글만 순 한글이었다. 다른 글을 읽기가 어렵고 선생님의 글은 한글이니까 읽기 시작했는데, 감동에 감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고, 그 글을 노트에 전부 옮겨 적기까지 했다. 선생님의 그 글에서 어린 학생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할 말이 있다'하는 나보고 '네가 누구냐?' 하는가? 내가 누구임을 말하리라. 나는 세례요한도 아니요, 남강도 아니지만 또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이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암만 준다 해도 내가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이런 말도 있었다.

'나는 또 무슨 종교의 거룩한 직원도 아니다. 중도 목사도, 감독도, 신부나 주교도 아니다. 모가지를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신부 목사는 절대 아니 된다... 나는 또 교육자도 학자도 아니다... 나는 또 예술가도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 없어 못한다. 할 수 있다면 이 원통한 속을 몇 천 년을 두고 억눌리고, 짓밟히고, 물리고, 찢기고, 지지우고, 째우고, 하다하다 못해 허리가 잘린 이 한, 이 아픔, 설음을 한번 하늘땅이 떠나가게 울었으면 좋겠는데, 속에선 타건만 이 목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못되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은 민초(民草)라니 풀 같은 것이다. 나는 풀이다!'


'나는 풀이다!' 하는 이 말씀이 내게 꽂혔고 큰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신가? 그때부터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의 마음속에 새겨졌다고 할 수 있다."

- 그 후 중앙신학교에서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와 함석헌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감회는 어땠나?
"앞에서 말한 대로 고교시절 함 선생님의 이름 석 자를 마음에 담았다. 그 후 선생님에게 편지를 드렸더니 뜻밖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와서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교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할 학비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 중앙신학교에서 농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신문광고를 봤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장에서 일하는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내가 갈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마음을 갖고 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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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내가 중앙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안병무 박사는 독일 유학을 가시고 안계셨지만, 그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이 중앙신학교에서 특강을 하시는 줄은 전혀 몰랐다. 어느 날 강의시간표에 함석헌 선생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야, 이 학교에 잘 들어왔구나! 하나님의 뜻이구나!'하고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절로 났다.

내가 함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선생님은 무슨 다른 교수님들처럼 노트라든가 메모 한 장 없이 강의하시는데 보통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 왕양명(王陽明)의 시 한편을 칠판에 써놓으시고 약 2시간가량 강의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險夷原不滯胸中 험하고 평평한 것이 원래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何異浮雲過太空 뜬구름이 허공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夜靜海濤三萬里 고요한 밤, 바다의 파도 삼만리를 가고
月明飛錫下天風 달이 밝은데 지팡이 휘두르며 하산할 때 하늘 바람이 일더라. (함석헌 역)


- 지난 1970년 4월 19일 함석헌이 <씨알의소리>를 창간했을 때, 왜 정년이 보장되고 안정된 중앙신학교 정규직 교원 자리를 그만두고 어떻게 비정규직이고 임시직인 <씨알의소리> 편집장을 맡게 되었나?
"정확한 것은 내가 <씨알의소리>에서 일하게 된 것은 1970년 창간 때는 아니고, 1971년 7월 <씨알의소리> 복간 때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씨알의소리>가 창간이 되고 2호를 계약된 인쇄소가 아닌 다른 인쇄소에서 인쇄했다는 이유로 문공부에서 폐간 처분을 받았다. 함 선생님은 13개월의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가 확정되었던 때다. 이때는 내가 중앙신학교직원을 이미 사임하고 실업자로 있었던 때였다.

내가 왜 중앙신학교(아래 중신) 정규직에서 사임을 했는가는 긴 사연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1965년 안병무 박사가 독일에서 귀국하여 학장이 되었고, 함석헌 선생님도 중신에서 전임강사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외에 허혁 박사, 박순경 박사 등 당시 유명한 교수들이 중신에 모여서 타 신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신학교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접고, 안 박사, 허 박사, 함 선생님 등이 중앙신학교를 떠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내게 나가라는 이는 없었다. 그 때 나는 중신의 교무서무를 다 맡고 있었고, 대학국어강의도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안 박사나 함 선생님이 안 계시는 중신에는 더 이상 있을 마음이 없다 생각했다. 젊은 기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지고 실업자로 있을 때, 안병무 박사가 나를 함 선생께 추천해 주셨고, 함 선생님은 기꺼이 받아주신 것이다." 

 

- 함석헌의 어떤 면에서 그렇게 매료되어 평생을 함석헌과 관계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인지?
"내가 평생을 함석헌과 관계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두 번 그만두었다가 다시 반복해서 복귀된 일이 있다. 첫 번 그만두게 된 것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관계로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나는 '안수 받지 말라' 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안수 받는 것도 좋다'하셨다. 그래서 2년간은 다른 분이 <씨알의소리> 편집을 맡았다. 물론 내가 없는 사이 선생님이 '선균이가 와야 하는데' 하시면서 나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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