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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 10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독립선언을 어떻게 소환했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8-04-03 15:18 조회49회 댓글0건

본문

함석헌 탄신 117주년 기념 강의 자료

 

 

31독립선언 100,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독립선언을 어떻게 소환했는가

 

 

김주용(원광대 조교수)

 

 

강의를 시작하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은 정부 차원의 행사를 조용히 치뤘다. 너무 조용해서 일반인들은 피부로 체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해가 훌쩍 지났다. 2018년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대한민국은 내년이면 대한민국의 국호를 탄생시킨 3.1운동 100주년을 맞이 하게 된다.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마치 인간이 산소를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이 당연하게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100년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만들 때 보였던 치열함은 어디로 가고 어느 해인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가 자신은 밥상에 숟가락만 언저놓았다고 한 수상 멘트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3년전 11일 차례를 마치고 경복궁에 아들과 함께 갔다. 이제 고 3 아들은 경복궁을 바라보면서 중국 사람이 정말 많다고 한다. 둘이 함께 고궁박물관에 들어가 특별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전시했다. 관람객들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부터 영조의 어진을 둘러보고 나왔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서 과연 태조가 500년 뒤에 이민족 일본에게 조선이 지배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1910829일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일장기가 펄럭일 것이라고 역대 조선의 임금들은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냉혹했다. 그로부터 벌써 109년이 지났는데 마치 천년전 이야기처럼 아주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든다. 저마다 현실의 삶의 무게를 견디느라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아예 망각해 버리고 싶은 과거의 역사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오늘 이 자리에서의 3.1운동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 지,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기념하고 있는 지 살펴보면서, 이것이 오늘날 왜 중요한지 서로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1. 31운동의 배경

 

3.1운동은 전 세계에 비폭력의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민족독립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하여 정의와 인도, 인류평등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창하였다.

1910822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를 시작으로 식민지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한국사회를 급속히 식민지적 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총독을 정점으로 한 식민지 통치의 최고기구였다. 930일자로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에는 조선 총독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으로서 육해군 대장으로 하고, 천황에 직접 예속하고 위임의 범위 내에서 조선에서의 일본 육해군을 통솔하고, 제반의 정무를 통괄하고,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를 행하고 재가를 받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 총독은 일본 천황을 제외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조선에서 행정·입법·사법권은 물론 군사권까지도 한 손에 장악한 절대적인 권력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국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무단통치의 물리적 기반은 통감부시기부터 항일의병전쟁 탄압의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치안유지의 중심기구로서 급속하게 확충되고 있던 일본군 헌병 및 경찰을 하나로 통합한 헌병경찰과 러일전쟁 때부터 사실상 한국을 강점하고 있던 조선주차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대였다. 한국의 경찰권은 이미 병합 직전인 19106월부터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주도로 일본에 위탁되었다. 이에 따라 비록 유명무실했지만 외형은 갖추고 있었던 한국의 경찰제도가 폐지되고 통감의 지휘 감독을 받는 일본군 헌병과 통감부 소속의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였다. 주한 일본군 헌병대장이 경찰의 책임자인 경무총장을 겸임하여 전체 경찰과 헌병을 지휘하며 각도에 주둔하는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무부장을 겸임하게 되었고, 그 아래에 헌병대원과 당시까지의 한국 경찰이 소속되었다. 이로써 군인인 헌병이 조선의 경찰사무를 집행하는 헌병경찰제도는 확립되었다.

 

언론통제와 교육에 의한 민족문화말살이라는 정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육군은 일본 정부에서 가장 藩閥色을 가진 세력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정치과정은 번벌과 민권파뒤에는 정당의 세력항쟁이며, 번벌측이 민권파·정당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주로 내부성을 통하여 언론통제를 자주 사용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군인에게는 언론인이 민권파·정당과 같은 부류이며 번벌의 아성을 흔드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병합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반일저항운동에 대한 탄압과 병행하여 언론통제라는 수단 강화는 사내정의에게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육에 대해서도 데라우치가 지향했던 것은 천황에 충실한 황국신민의 육성이었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교육에 관한 칙어의 반포에 의해 이미 행해졌다. 그가 제정한 조선교육령 제2조에는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는 것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육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교육을 중시하는 이등박문의 정책에 대해서 비용 부담을 이유로 비판적이었던 사내정의에게 교육은 황국신민의 육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정도에서만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내정의는 애초부터 학교의 보급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학교교육 내용에서도 한국인이 추구하는 민족교육과 고등교육을 실행할 리는 없었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한국인과 서양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일부도 학교의 숫자가 적은 것, 교육 내용의 정도가 낮은 것, 한국인에 대한 차별 등을 지적하며, 그것이 우민화교육에 불과하며 탄압적인 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2.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191931일 민족적 거사를 위해 모든 준비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전개한 2.8 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아 211일 최남선에 의해 독립선언서의 기초가 완료되었으며, 225일 밤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의 감독 아래 25천매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및 학생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그리고 3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은 탑골 공원에서 따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31일 오후 2시경, 후일 국어학자로 알려지는 이희승은 탑골공원의 3·1만세운동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으며,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 온 시골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 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 타고 지나던 일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해가 저물어도 만세소리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이때부터 일본 관헌들의 잔인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평화적인 시위 군중에 대하여 창과 칼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안국동 부근에서는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여인에 대해 일 순경이 환도로 팔을 내리쳐 잘라버렸다. 여기저기서 이러한 일들이 생겨났다.

 

또한 당시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 정석해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기록했다.

 

백의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대열에 가담했다. 인파는 광화문 네거리까지 꽉 메웠다. 우리 눈에는 왜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만세꾼들이었다. 우리의 발걸음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은 지축을 진동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러서 대열은 양분되었다. 한 대열은 경복궁으로 향했다. 그 후에 들은 말이지만 그리로 가서 광화문 앞에서 만세를 부를 때에는 순사 한 사람이 순사 모자와 제복을 찢어 던지고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가담하여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날 시위대에 참가하였던 정석해는 시위대가 충무로와 퇴계로 쪽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시위군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진고개 좁은 거리에는 수만의 군중이 꽉 들어차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좌우편 상점의 왜놈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는지 모두들 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데모 대열이 지금의 세종호텔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 갑자기 두 명의 기병이 마상에서 검을 휘두르면서 데모대를 향하여 마구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 비좁은 거리에서 데모대는 좌우로 갈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왜놈의 상점으로 밀려들게 되니 유리창문이 깨어졌다. 이 무자비한 칼부림 바람에 대열은 골목으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들과 시민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공원 밖으로 진출하였다. 시위대에는 남녀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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