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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재 서남동 교수님을 다시 생각하며 -김성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8-03-29 11:05 조회71회 댓글0건

본문

 

죽재 서남동 교수님을 다시 생각하며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⑪

김성재 | 승인 2018.03.25 23:14

죽재 서남동 교수님은 민중신학자가 되기 전에 별호는 신학의 안테나였다. 우리나라에 서구에서 새로 발표된 신학을 제일먼저 소개하고 기독교사상에 글을 쓴 교수님이어서 그런 별호가 붙었다. 1960년대부터 민중신학에 몰두하기 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 기독교사상을 보면 서남동 교수님의 신학순례 여정을 알 수 있다. 토착화신학(뉴기빈), 세속화신학(하비 콕스), 비종교화신학(본회퍼), 생태신학(샤르뎅) 등 1960년대 이후 현대신학을 거의 섭렵했다.

한번은 서남동 교수님이 한국신학대학에서 “생태신학이 오늘날 신학의 근본이다”라고 강연하시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 그전에는 비종교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것은 이제 틀린 것인가요? 그러면 다음 신학은 무엇인가요? 그때는 또 생태신학도 덜 중요해지나요?“ 하고 약간 비판적으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은 나도 모른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신학적 사명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그 순간 채플 강연장에 아! 하는 내적 소리와 함께 침묵의 감동이 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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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동 선생님의 가족분들 ⓒ죽재 서남동 목사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그후 1974년 봄에 한국신학대학 부설로 선교신학대학원이 설립되었을 때, 서남동 교수님은 외래교수로서 문화신학을 담당했다. 선교신학대학원은 문동환 교수님이 WCC로부터 현장중심의 새로운 신학교육 실험프로젝트를 맡으셔서 설립한 것이다. 이 대학원 교수진은 한신대 교수들과 외부에서 일반학문 교수로서 정치학은 연세대 이극찬 교수, 경제는 서울대 변형윤 교수, 사회학은 이대 이효재 교수, 행정학은 고대 이문영 교수, 자연과학은 고대 김용준 교수, 법은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가 참여했다. 그때 나는 책임연구원으로 간사 일을 했고, 박종화 목사가 군목에서 재대하고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선교신학대학원은 현장중심신학교육을 목적했기 때문에 참여한 학생 중심으로 분과를 만들어 학생들 스스로 현장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 제반 인문, 사회, 자연과학적 물음과 대화하는 워크숍을 통해 한 학기 커리큘럼을 운영했다. 학생들은 교회목회 목사와 직장을 가진 평신도들이었다. 입학시험은 없고, 참여한 학생들이 하고 싶어 하는 목회와 선교과제들을 제출하면 공동학습을 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형성되는 과제 제출자는 합격하고 그렇지 못하면 다음 기회에 다시 참여하도록 했다.

처음 형성된 공동학습 분과는 교회선교, 사회선교, 문화선교분과였다. 학생들은 각 분과 10명 내외였다. 교회선교분과에는 김용원, 최희암 목사 그리고 후에 목사가 된 김원철 목사, 김지선 연신도회총무 등이 참여했고, 사회선교분과에는 이창복(전 의원), 한명숙(전 국무총리), 손학규(전 경기지사)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문화교육선교분과에는 박화목 시인, 석용원 시인, 박병희 한신국민학교교장 등이 참여했다. 학생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간교육을 해야 해서 월, 화 저녁에 경동교회에서 했다. 월요일은 과제 워크숍을 하고 화요일은 교수들이 한 학기에 읽어야 할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교신학대학원은 교수진의 명성과 각 분야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개념지식으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일반학문적 물음을 종합적으로 물으며 교수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학습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WCC에 제출한 1년 교육경과 중간 리포트도 놀라운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난 1975년 가을 학기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한국신학대학은 전국에서 가장 선도적 데모를 하는 학교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도 민주화운동에 가장 앞섰기 때문에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미 1973년 유신반대 데모를 한 학생들을 제적 등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문교부의 압력에 맞서 김정준 학장과 교수들이 삭발투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후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발동 이후 독재정권은 더욱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긴급조치 1호는 장준하 선생이 1973년 가을부터 유신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발효되었다. 그때 나는 청년, 학생 책임을 지고 서명운동을 하다가 1월 8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이틀 동안 밤잠 못자고 구타당하면서 심문받았다. 처음에 나보고 어디 도망갔다 잡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도망 간 것이 아니고 1월 8일 내가 초동교회에서 가르치던 여고생이 연탄가스로 죽어서 장례식 하고 왔다고 하면서 그 학생 아버지가 5.16 때 혁검부장 하던 박창암 장군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심문하던 소령이 그 학생 이름을 말하면서 그 학생이 죽었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박 장군 부관으로 있을 때 업어주기도 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더니 괜히 오래고생 하지 말고 빨리 조서 꾸미고 집에 가라고 했다. 서명은 받았지만 많이 받지 못했고, 받은 서명용지는 장준하 선생께 갖다드렸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쓰고 나왔다.

1975년 문교부는 데모 주동학생을 제적하고 정치교수인 문동환ㆍ안병무 두 교수를 해직시키지 않으면 폐교하겠다고 겁박했다. 학장과 교수들은 거부하였지만 결국 김정준 학장이 두 교수 해직과 학생들 제적에 서명하고 학장직을 물러났다. 또한 문교부는 선교신학대학원이 불법이기 때문에 문 닫으라고 해서 선교신학대학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단 신학교가 이렇게 희생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결단을 하고 1975년 가을 정기총회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했다. 문교부 당국의 졸업장을 받지 않고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육을 자율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선교교육원이다. 선교교육원을 설립해서 기장교단이 한신대에서 제적된 학생들만이 아니라 타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도 신학을 하기 원하면 교육받고 목사가 되는 자격을 주도록 했다.

대표적으로 이원희, 권진관, 권오성 등이 선교교육원에서 교육받고 목사와 교수가 되었다. 교수진들도 한신대에서 해직된 문동환, 안병무 교수 외에 연세대에서 해직된 김찬국, 서남동 교수, 이대에서 해직된 서광선, 이효재 교수, 고려대에서 해직된 이문명, 김용준 교수, 서울대에서 해직된 변형윤, 한완상, 백낙청 교수, 서울여대에서 해직된 이우정 교수, 숙대에서 해직된 이만열 교수, 한양대에서 해직된 정창열 교수, 전남대에서 해직된 송기숙 교수, 백기완 선생, 박현채 선생, 송건호 선생, 한승헌 변호사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 해직교수들은 거의 모두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원들과 선교신학대학원 교수들이었다. 폐쇄되었던 선교신학대학원도 초기에 선교교유원에서 계속하다가 후에 목회자 계속교육으로 바뀌었다.

현 교육원인 선교교육원 장소는 어윈 선교사가 살던 집이었는데, 캐나다 선교부로부터 기증받았고, 교육연구비는 독일교회가 후원했다. 초대 원장은 안병무 박사가 맡았다. 나는 1976년부터 한신대 전임강사로 내정 받았는데 포기하고 1975년 12월부터 선교교육원 책임간사로 일했다. 제일 처음 한 일이 어윈 선교사 집을 개조해서 교육원 시설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교육원 시설 도면을 그리고 목수와 함께 작업했다. 1976년 3월 2일에 개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일을 했다. 그런데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함께 미사 중에 “3.1민주구국선언”을 한 것이 내란음모라는 어마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3.1민주구국선언을 하게 된 것은 문익환 목사님이 1975년 등산 중 의문사한(당국의 암살의혹) 중국 용정에서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장준하 선생의 장례위원장을 맡았었는데, 1976년 1월 점점 더 심해지는 독재탄압에 문익환 목사님이 성서번역을 하다가 문득 장준하 선생을 생각하면서 ”장형이 살아있으면 이 엄혹한 독재탄압에 대해 무엇을 했을 텐데“ 하는 독백 아닌 독백을 했는데, 갑자기 장준하가 ”너는!“ 하고 말해서 화들짝 놀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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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구국선언 당시 명동성당 미사에 참여한 인사들. 사진 제일 왼쪽이 함석헌 선생과 사진 제일 오른쪽이 김대중 전 대통령. ⓒ함석헌 평화 포럼

그래서 문익환 목사님이 나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시면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고 수유리 문익환 목사님 댁을 기점으로 가까이 설던 안병무, 함석헌, 이문영 그리고 방학동 새벽의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문동환, 이우정 교수가 참여하고, 서남동 교수, 윤보선 전 대통령, 정일형 박사 그리고 윤반웅 목사가 참여해서 성명서 초안을 검토했다. 이런 과정에 김대중 선생도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이태영 변호사로부터 듣고 비밀리에 김대중 선생과도 연락울 취했다. 이 모든 일에 연락은 내가 맡았고, 성명서 암호는 ‘한복’이었다.

김대중 선생 댁에 ‘한복’이 다 되었다고 연락하면 당시 이희호 여사 동생이 목동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서 김대중 선생이 제안한 성명서를 가지고 와서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댁과 봉원동에 있는 정일형 박사 댁에 모여 토의해서 성명서를 완성하여 서명하고 3월1일 미사 때 이우정 선생이 낭독하기로 했다. 문익환 목사님은 성명서 초안을 만들고 이 일을 주동하는 동안 발이 땅에 붙어있지 않았다고 박용길 사모님이 말씀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님은 당시 가톨릭과 성서를 공동번역하는 위원장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고 혹시 문제가 되면 문동환 박사가 주동한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렇게 의도한 계획은 심문과정에서 거짓말을 못해 본 분들이어서 곧 문익환 목사가 주동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3.1민주구국선언으로 서명자 전원이 구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미사 때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한 후 미사가 끝나면 선교교육원에 모여서 다음날 개원하는 최종점검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교수님만 오고 다른 교수님들이 오지 않았다. 연락을 취해보니 이우정, 문동환 교수님과 문익환 목사님이 연행되어 갔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안병무 교수님이 우리도 경찰서에 가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각 교수님들 댁에 가서 소식 전하고 책장에 문제가 될 책들을 정리해주고 구속되면 어떻게 살라는 말들을 아내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마치 유언을 듣는 것 같은 심정으로 그 말씀을 들었다.

세 교수님들이 서대문 경찰서로 간 후 나는 택시를 대절해서 제일 먼 곳인 방학동 새벽의 집 문동환 박사 댁에 가서 문혜림 사모님께 말씀드리고 책 정리 하고, 이어서 창동 이문영 교수님 댁, 수유리 문익환 목사님 댁, 안병무 교수님 댁을 갔다가 신촌 연세대 구내에 있는 서남동 교수님 댁으로 왔다. 그런데 연세대 후문 철장 담에 경찰들이 많이 지키고 있어서 그냥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택시에서 내리지 않고 돌아 나와 연세대 정문 있는 곳에 내려서 박대인 선교사님께 전화를 했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함께 서남동 교수님 댁을 가지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함께 갔다.

그런데 서남동 교수님 댁에 가니 서남동 교수님이 거실에서 커피를 갈고 계셨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서대문 경찰서로 갔더니 아직 위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으니 댁에 가 계시면 연락하겠다고 그냥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남동 교수님이 직접 갈아서 타주는 커피 한잔 마시고 박대인 선교사와 연세대 교문을 나섰는데, 형사 둘이 따라와서 나를 서대문서로 연행했다.

서대문경찰서에 가니 당시 악명(?) 높은 차 형사가 때리고 차고 했다. 그리고 나서 서남동 교수집에 왜 갔느냐고 하면서 서 교수가 어디로 피신해 있느냐고 그곳을 대라고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서 교수님이 집에 계시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새로 발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문안 차 들렸다고 했더니 택시 타고 왔다가 다시 돌아가서 선교사와 함께 서 교수집에 간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거짓말 한다고 또 다시 마구 때렸다. 나는 맞으면서 선교교육원 개원일로 교수들께 연락드리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날 경찰 집무실 벽에 크게 국가 반란 모의자 조직도와 명단이 게재되었다. 나는 놀라서 보니 김대중 선생을 정점으로 조직표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가톨릭 신부까지 포함된 18명 명단에서 내 이름에는 의문표 ?가 있었다. 얼마 안 있더니 앞으로 조심하라고 하면서 내보내주었다. 나오자마자 문동환 박사님 댁에 전화했더니 문동환 박사님한테 집에 가있으라고 해서 집에 왔다가 그 다음날 다시 잡혀갔다고 했다. 다른 교수님들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해동 목사님이 잡혀갔다고 했다. 이해동 목사님은 ‘3.1민주구국선언서 작성에 참여도 안했고 서명도 안했는데, 성명서를 한빛교회에서 등사한 것이 발각되어서 잡혀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것인데, 처음에는 내가 연락책이었다는 들통이 나서 18명 안에 들어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선생이 함께 주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모두 잡아들여서 조치해 하고 명령해서 집에 돌아갔던 분들이 다시 연행되어왔고, 김대중 선생을 주범이 된 조직으로 반국가 사건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내가 나이가 너무 어려 고심하던 중 이해동 목사가 성명서를 교회에서 등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18명 명단에서 내 이름과 이해동 목사님 이름이 바꾸어진 것이다.

선언문의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10명이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된 이후 구속된 사람은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윤반웅, 신현봉, 문정현, 함세웅, 이해동 등 11명이고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은 고령으로, 이태영, 이우정은 여성이고, 김승훈, 장덕필 신부는 단순가담자로 불구속되고 김택암, 안충석 신부는 직접 가담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소유예 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안병무 박사님은 원장 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김성환 목사님이 부원장으로 직무대행했고, 나는 수석책임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렇게 개원된 선교교육원은 민중신학, 민중경제학, 민중사학, 민중사회학, 민중문학, 민중언론 등 한국민중운동의 본산이 되고 요람이 되었다. 선교교육원에는 제적된 학생들과 해직된 교수들만이 아니라 해직된 언론인 그리고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운동가들도 모였고,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석방되면 이곳에 와서 자유의 축하잔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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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된 것은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이전에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분신을 통해 당시 언론 통제 하에 모르고 있었던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들이 하루조차 제대로 연명하기 어려운 처절한 가난의 현실을 폭로하면서 대학생들이 학생운동 차원을 넘어 자퇴하고 노동자, 빈민운동에 참여했다. 1971년 8월 당시 서울시는 청계천변 판자촌을 철거하고 이들을 경기도 광주에 내다 버리듯이 했는데, 이들이 배고파서 살다 못해 서울로 들어오는 배추 트럭을 탈취해서 시청으로 돌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광주대단지사건’이다. 나도 당시 청계천에서 살다가 이들과 함께 철거되어 실려 가서 성남과 광주대단지에서 한신대 대학원에 다녔다.

이를 계기로 박형규 목사님을 중심으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권호경, 이규상, 허병섭, 이해학, 손학규, 이철용 등이 참여했다. 당시 나는 한신대 다닐 때부터 청계천 빈빈지역에서 살았고, 동대문 기동차 역 옆에 있는 동부교회에서 의식화 야학을 하고 있었다. 나는 1970년 파울로 프레이리의 ‘피압박자교육학“이란 책을 읽고 그의 교육방법인 의식화교육으로 야학을 했다. 후에 등사판으로 번역해서 비밀리에 운동권 교재로 배포했다.

그래서 의식화교육운동이 일어났고, 나는 각 대학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 가서 의식화교육을 강의했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도 내가 하는 의식화야학에 잠시 왔었다. 그 후에 동생 전태삼도 나와 야학을 같이 했고 동생 전순옥이 영국에서 공부하는 것을 이희호 여사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주기도 했다. 놀랍게도 전순옥은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대학에 취직하려고 하지 않고 창신동 산동네에 가서 그들과 가내봉제업을 하면서 그들 현실 문제를 증언하고 그 해결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청계천 현장에 신학자들을 초청해서 민중현장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하게 했다. 이때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학자가 안병무, 문동환, 현영학 등이었다. 나도 이 위원회 선배 실무자들과 연대활동을 했기 때문에 참여해서 의식화교육, 민중교육을 함께 토론했다. 민중신학은 이렇게 청계천변 빈민민중현장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민중신학이 신학의 주류 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75년 연세대 김동길, 김찬국 두 교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것을 환영하는 기독자교수협 강연회에서 안병무교수가 한 “민족, 민중, 교회”라는 주제강연, 그리고 서남동 교수가 기독교사상 1975년 4월호에 쓴 “민중신학- 김형호 교수의 비판에 답함“이란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서남동 교수님은 처음부터 민중신학자는 아니었고, 민중신학은 신학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캐나다에 갔다가 일본 동경을 갔을 때 그곳에서 김지하의 육혈포 시가 구원의 십자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 하면서 김지하 시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서남동 교수는 한국에 돌아와서 김지하 시를 깊이 읽고 본격적으로 민중신학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육혈포’와 ‘장일담’이란 시였다. 장일담 시에서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서남동 교수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이 민중의 한과 한의 사제라는 주제로 탄생했다.

이후 서남동교수는 민중이 텍스트이고 성서가 콘텍스트라는 대담한 주장을 폈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예수사건은 민중사건이고, 예수의 부활은 민중의 부활이라고 “민중사건신학”을 주창한 안병무 교수보다 더 급진적인 민중신학이었다. 안병무 교수는 끝까지 성서가 텍스트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병무 교수님이 평신도이면서도 한신대 교수를 하고 선교교육원 초대원장을 하고 많은 교회들로부터 설교와 강연을 요청받은 것은, 성만찬 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서가 텍스트라는 확고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병무 교수님은 성서학자였고, 서남동 교수님은 조직신학자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서남동 교수님은 민중이 텍스트이고 성서가 콘텍스트라고 주창해서 교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석방된 후 제2대 선교교육원 원장을 하셨지만 주로 선교교육원에서 집필하시고 교회에서 초청받은 경우는 별로 없었다. 나는 1978년까지 선교교육원에서 서남동 교수님을 모시고 있다가 1979년 한신대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서남동 교수님을 생각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슨 글을 써야할까 하면서 서남동 교수님을 다시 생각해보니 서남동 교수님은 참으로 맑은 인품을 가지고 양심적 신앙인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신학을 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특정신학 지식에 매이지 않고 서남동 교수님처럼 끊임없이 신학적 물음을 성실하게 물으며 신학에 몰두한 신학자가 별로 많지 않다. 신학의 안테나는 게으른 신학자가 절대로 할 수 없고, 민중이 텍스트이고 성서가 콘텍스트라는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민중을 객관화 개념화하고 사회과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제2, 3 세대 민중신학자들이 말할 수 없는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은 해방신학과 다르다. 해방신학은 하나님과 예수를 개념화해서 철학적 물음을 하는 서구 관념적 신학에서 가난의 문제를 정치경제사적으로 해석한 기여도가 있지만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민중신학은 보잘 것 없는 민중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와 문화의 주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현영학 교수의 “탈춤의 신학”을 보면 그 깨달음 과정이 소상히 나온다. 그래서 민중은 개념으로 말할 수 없기에 영어 표기도 그대로 MINJUNG으로 말했다. 한국학문사에서 최초로 지명이거나 인명이 아닌 학문의 주제를 영어로 재해석하여 표기하지 않고 고유표기를 한 것이다. 그래서 서양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높이 평가하고 민중신학과 대화하고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해방신학자 꾸띠에레즈와 보니노도 남미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만 보았지, 남미 인디오를 역사와 문화의 주체로 보지 못했던 것을 민중신학이 일깨워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신학은 신앙실천의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대상을 객관화하고 개념화하지 않으면 학문을 할 수 없는 신학방법으로는 더 이상 신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신학은 지배자, 가진자에게 봉사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을 객관화하고 개념화한 신학은 오늘도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그 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더욱이 민중을 개념화해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은 민중을 자신들의 지적유희 대상으로 객관화, 도구화하여 다시 서구지식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반신학적이고, 반신앙적이고, 지배자, 압제자의 도구가 되는 불의한 신학이 된다.

이런 점에서 침체된 민중신학을 다시 살리는 길은 서남동 교수의 “두 이야기 합류 민중신학”과 안병무 교수의 “민중신학 이야기”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은 책상 앞에서 하는 사유의 신학이 아니다.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민중의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병듦, 매맞음, 감옥에 갇힘에 합일된 예수를 함께 발견하는 것이고, 민중의 한과 예수의 한이 하나 되고 민중의 죽임 당함과 예수의 죽임 당함이 하나 된 수난사건에서 민중-예수가 구원의 주체가 되어 새생명으로 되살아나는 부활사건이 민중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성재 김대중 아카데미 원장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50여 년 만에 이뤄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5대)을 지냈으며 45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보기 드문 측근이자 학자, 언론인이다.
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관장,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석좌교수,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상임대표, 아시아태평양민주지도자의회 이사장, 사랑의 친구들 회장, 문화관광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한신대학교 교수평의회 회장 등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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