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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ㆍ 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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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6-07-19 09:44 조회2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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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ㆍ 신信



 그런데 내가 그 시를 쓰며 이번에 느낀 것은 이것이다. 즉 정말 내가 실 감한 그것은 사실은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어려워서가 아니요, 고상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 것은 내 것이요, 다른 사람의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詩)는 언지야(言志也)라, 옛사람이 말했지만, 지(志)란 무어냐? 뜻 이란 어떤 거냐? [내] 뜻을 나도 여실히 표할 길이 없어 바람〔風〕에 붙이고 달〔月〕에 붙이는 그 내 뜻을 다른 사람이 누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어떻게 알게 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나?

듣는 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뿐이다. 내 시야말로 내 것인데, 내 속에서 나간 내 혼정(魂精)인데, 내 아들인데. 나만이 낳고 나만이 아는 것인데, 내 생명의 지성소(至聖所)에서 나와 내 님만이 만나서 지난 일인데,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인 일인데, 그것을 누가 안단 말이냐? 알게 할 방법도 없거니와 알게 해서 될 일이냐?

그러나 또 정말 알리지 않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반드시 알려지는 것이요, 또 알리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다. 시는 숨기며 알리는 것이요, 알리며 숨기는 것이다. 생명은 드러내놓은 비밀이다. 부부의 사랑은 절대 비밀이지만 또 이것처럼 천하에 공개된 사실이 어디 있나? 그것은 감추기 위해 드러내놓은 것이요, 드러내놓기 위해 감춘 것이 아닌가? 사랑은 감추고 싶고, 아들은 천하에 자랑하고 싶고.

천지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은가? 뿌리는 땅속 깊은 데 숨는 것이요, 꽃은 밝은 하늘 가운데 웃는 것이다. 감추기만 해도 못쓰는 것이요, 드러내놓기만 해도 못쓴다. 그[것]들은 다 거짓이요 참이 아니다. 참 것이라면 반드시 감춤으로 드러내고, 드러내놓아 감추는 것이다. 감춤으로 감추는 감춤은 몇 날이 못 가서 천하에 빤히 드러나고야 는 것이요, 드러냄으로 드러내는 드러냄은 몇 날이 못 가서 아무도 볼 수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주의 신비는 드러내놓은 신비기 때문에 누구나 깨칠 수 없이 영원한 신비다.

하나님은 백주(白晝)에 숨으시는 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보아도 볼 수가 없고, 보지 못해도 보이는 이다. 그런고로 그가 영원히 살아 계신다. 만물은 하나님의 시다. 그러나 드러내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는 놈이 없다.

이것이 무어냐? 생명의 신비 아니냐?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는, 그러나 또 잘 아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다.

시는 아들이요, 아들은 시다.
사랑에서 시가 나오고 시에서 사랑을 안다.

시 없는 생활은 참담한 들판이 아니냐? 물 없는 시내가 아니냐? 그렇기에 사람들이 이 적막이 무서워서 가정이란 감옥에서도 살기를 원한다. 사실 감옥 아니냐? 그래 너는 아직 모를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결혼을 아니 했다기로 그만한 나이에 그것도 모르겠느냐? 알지 않느냐, 감옥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 들어가기를 자원(自願)한다. 웬일이냐? 다름 아니요 거기서 아들을 낳기 때문이다. 시가 있기 때문이다. 가정이란 시를 가진 감옥이다.

가정만이냐, 교회란 무엇이냐? 그것도 시를 가진 감옥이다. 이 인간 사회 전체는 왜 감옥이 아니라더냐? 그것도 인간이 그 속에 갇히는 감옥이다. 그 속에서 질식이 되다 되다, 나가려고 애를 쓰다 쓰다, 손톱 발톱으로 허벼보다, 목을 빼어 넘겨다보다, 깃 끄트머리로 파득여보다, 하다 하다 못해 기진맥진해 그 음음(陰陰)한 담 밑에 죽고 마는 감옥이다.

그러나 그것만 아니다. 죽기도 하지만 나오기도 한다. 갇히기도 하지만 자라기도 한다. 물론 거의 하늘에 닿는 그 담을 날아 넘는 놈은 많지는 못하다. 그러나 없지는 않다. 그들은 무엇을 먹고 그 안에서 살았고, 무엇으로 자라 무슨 힘으로 그 옥을 넘나? 시를 먹고 산다 [육신은 밥을 먹고 살지만 혼은 시를 먹고 산다.]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짓고 산다. 혼에는 지음이 먹음이다.

시를 낳는다. 인생이란 여죄수가 이 사회란, 이 교회란, 이 가정이란 감방 안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는 유화부인(柳花夫人) 모양으로 이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만나 남 모르게 애기를 베었던 것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으면 젊음이 빠지고 아름다움이 잃어진다. 하지만, 인생은 시를 낳으면 낳을수록 더 젊어지고 고와간다.

이 세상이 감옥 아니냐? 분명 감옥 아니냐? 너도 나도 이 음냉한 감방에서 배꼽줄이 떨어지지 않았느냐? 너도 나도 이 벽을 두드리며 노래해서 이날껏 살아온 것 아니냐? 너도 나도 이 담 너머 저 세계, 저 풍편(風便) 에 들려온 (세계), 갸륵한 우리 맘이 제 후각(嗅覺)으로 맡아서 안 저 빛의 나라가 그리워서, 자유의 나라가 그리워서 애를 태우는 존재 아니냐? 이 가정에서 우리의 등심이 상해 그만 더 자라지를 못하고 꼽새가 되고 말지 않았느냐? 이 사회에서 그만 손발이 얼고 옴이 올라 그 곱고 튼튼하던 몸이 다 못쓰게 되고 말지 않았느냐? 이 교회에서 눈이 어둡고 날개깃을 뽑혀 도무지 날 수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감옥은 분명 감옥이다. 그러나 그래도 이 안에 시가 있다, 옥이기 때문이 시가 있다. 이것이 시 아니냐? 이렇게 내가 너를 생각하고 네가 나를 그리워하며 이 돌담을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시 아니냐? 이 부자유 때문에, 이 압박 때문에, 이 질식 때문에 나오는 시 아니냐?

이것이 곧 삶 아니냐?
이것이 곧 이김 아니냐?
이것이 곧 기쁨 아니냐?
시를 낳았으면 그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좁아지면 넓어진다.
급해지면 한가해진다.
죽게 되면 살아난다.
목을 잘릴까 겁이 나느냐?

네 손으로 네 목을 먼저 잘라 높이 들고 네거리를 다니며 휘파람을 불어 보아라. 그러면 언제든지 맘이 평안하고 대들 놈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럼 시를 낳으려 옥엘 갈까? 옥살이를 하려고 시를 지을까? 네로는 로마성에 불을 지르지 않았나? 시를 짓기 위해 로마를 지옥화했나? 로마가 지옥인 고로 시가 나왔나?

내가 네로가 돼도 무방한 일이지, 이미 된지도 모르지. 네로는 로마를 지옥으로 만들고 불을 질렀지만 단테, 밀턴은 지구덩이 전체를 지옥화하고 불을 지르지 않았나? 저것이 미쳤다면 이것들은 더 크게 미친 미치광이 아닌가? 그러나 그만치 그 화광(火光)이 높이 충천(衝天)하지 않았나. 네로는 불을 질러도 모닥불밖에 못 되어 뛰어넘다가 제 스스로 거기 떨어 져 들어가 타 죽은 거지만, 정말 옳은 불을 지른 이들은 그 화광을 타고 모두 울타리를 넘었다.

일찍이, 이 생명의 뜻을 말하는 시가 있었다. 이 어두운 감옥 속에 비치는 불길이었다. 그는 참 뜻을 말씀하는 참 시였다. 이 우주의 아들이었다. 하나 되는 님이 이 우주의 울타리 그늘에 우는 처녀를 만나 그 속에 넣고 그 속에서 키워낸 아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보다 더 큰 시가 어디 있느냐? 그 외에 또 시가 어디 있느냐? 누구니 누구니 하여도 다 그 붙는 불길에서 깃 끄트머리를 붙여본 것들뿐이다.

시는 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기쁘고도 슬프다. 내 아들의 손목을 잡고 천하대도(天下大道)를 거니는 일, 그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 나실 때에 천군(天軍) 천사(天使)가 찬송을 했다 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은 또 슬픈 일이다. 내 님을 만나 골방을 뒤집어 공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시를 읽는 일은 아무리 감격하는 청중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 일이요 ‘모를 거다’ ‘오해할 거다’ ‘더럽힐 거다’ 하는 슬픔을 아니가질 수 없다.

정말 모른다. 내 말은 누구나 모른다. 알 리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거다. 그리 생각할 때 슬프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의 빈약한 시조차 그러니, 하늘에서 울려 내려온 하나님의 시는 얼마나도 그럴 것이냐?

모르는 일은 슬프지만, 또 알아도 걱정이다. 듣고 모를 줄을 아니 내가 말하지, [만일] 정말 살 밑을 알아버릴 줄 알면 말하지 않는다. 알아버리면 나는 죽는다. 하나님은 자기가 영원히 사시기 위하여 자기 깊은 속을 영원히 감추시는 이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의 시를 밤알 까듯이 완전히 깨쳐버린다면 그 하나님은 벌써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비유 속에 숨으신다. [시는 몰라야 하는 것이다.]

시는 산골짜기 시냇물이다. 시냇물 속의 소(淵)다. 그 속에 노는 생명의 고기는 보면서 못 보는 것이다.
시는 신랑 신부의 말이다. 다른 사람은 알고도 모른다.
시 없는 가정이 있다면 어찌할까?

시정 (詩精)을 품어도 쏘아 넣을 태반(胎盤)이 없고 길러낼 가정을 가지지 못한 혼이 있다면 어찌할까, 그리고 그 둘은 분명히 세상에 많지 않은가?

이 세상 좁다고 씨움 많기는 시 없기 때문이요,
이 세상 과민한 맘 많기는 집 못 얻어 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란 말을 하지 말자. 그것도 역시 부족한 말이다. 시(詩)를 말고 신(信)을 말하자. 산사(山寺)를 버리고 인간으로 내려오자.

시가 끊어진 곳에야 시가 살아 있다. 산시가 있다.
가람(伽藍)의 종교를 버리고 인격의 신앙으로 들어가자.

시를 짓자 붓을 들지만 붓을 들어서는 어떻게 할 거냐? 붓 드는 자가 있으면 끌 드는 자가 있을 것이요, 물감 든 자가 있을 것 아니냐? 줄을 고르는 놈도 있을 것이요, 긴소매를 떨치는 놈도 있을 것 아니냐? 넷 다섯이 들러붙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만두자. 손을 합하고, 입을 다물고, 무릎을 꿇자.
생명의 일이요 인격의 일이다.
입과 입의 맞춤이다.
눈과 눈의 맞음이다.
아니다. 혼과 혼의 녹아듦이다.
거기는 여러 말이 있을 수 없다.
“알지”
“응 알았다” 아멘. 뿐이다.
사실 그 자리에는 이미 말이 끊어졌다.
시는 지성소에는 없다, 거기 들어가기 전의 말이요, 들어갔다 나와서의 말이다.
지성소 안에는 말이 없다.
생명을 불사르는 분향(焚香)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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