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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수와 유다,그리고 함석헌(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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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8-04-06 11:12 조회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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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유다, 그리고 유다 함석헌


김성수

(오마이뉴스, 2017.10.16)

 

예수는 과연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의 의중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예수는 로마식민통치로부터 무력과 유혈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계획하는 과격한 유대인 민족진영으로부터, 점차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킬 민족지도자, 잠재적 메시아로 열렬한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그런 면에서 친로마파인 기득권 층의 유대인들과 로마식민정권에서 예수를 경계하고 그의 언행으로부터 권력도전, 체제전복의 위협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예수의 언행은 종교인으로서는 '너무 정치에 간섭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반면 사회혁명가, 잠재적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종교적'인 냄새를 풍겼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유다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 해봄으로, 예수가 과연 순수한 종교사상가였는지 아니면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정치적 행동가였는지의 여부를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서역사가들은 유다가 로마식민정권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유대인 독립운동단체인 열심당 (Zealots)의 열광적인 회원이었거나 최소한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열심당은 일제강점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비슷한 단체다. 한국의 광복군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심당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애 외에, 로마식민정권에 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는 자신들의 독립운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役事)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민족주의에 유대교의 종교신앙이 함께 합쳐진 과격한 정치, 종교적 지하조직이 열심당이다.

유다는 과격한 행동주의자였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와는 달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로마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는 야심에 차있었다. 비록 유다만이 예수의 열두제자 중 오직 갈릴리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다를 회계로 임명한 것이 주목을 끈다. 이것을 197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풀이하면, 재야조직원 중에서 오직 유다만이 유일하게 호남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남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단체에서 중책을 맡은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돈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신뢰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얼렁뚱땅한 아무사람한테나 자기들의 돈을 맡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회계직이 유다에게 금전적 욕구를 불러일으킬 유혹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전지전능한 예수는 그를 돈을 관리하는 자리에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다 자신도 돈 몇 푼 훔치는데 관심이 있는 좀도둑 근성이 있었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전도자인 예수를 쫓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착취로부터 식민지 이스라엘의 빈곤과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이 예민한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스승 예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유다가 예수의 뒤를 따라다닌 동기는 종교적 동기나 금전적 동기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적인 동기와 사회, 정치적 동기라는 것이다.

유다의 주요 관심사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그의 조국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었고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유다는 민중봉기를 일으킬 잠재적 영향력이 있는 예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다와 예수는 오랜 기간 동안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둘은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숙식을 함께 했을 것이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주제로 토론, 대화, 심지어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예수 곁에서 1년 혹은 3년을 지내며 유다는 예수의 정치-사회적 메시아로서의 잠재력에 확고한 신념을 가졌을 것이다. 유다는 예수제자 중 가장 열렬한 민족주의자였고, 순진하고 단순 투박한 갈릴리 출신의 다른 제자들보다 현실감각이 날카롭고 빠른 냉철한 행동가로서 예수의 정치적 잠재력을 용이하게 꿰뚫어 보았다.

무력을 동원한 정치적 독립과 로마체제 전복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유다가 예수의 '정치적 잠재성'을 파악 못했더라면 순수히 '종교적이고 복음적인' 예수 곁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빨리 떠났을 것이다. 아마도 유다는 실제로 예수가 정치적 의미의 통치자, 즉 로마제국에 대항해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유다는 적절한 시기가 되면 예수가 열심당과 연합해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억압자 로마정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물리적 전투도 불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예수가 자기들을 로마의 예속되고 속박된 위치에서 물리적으로 해방 시켜줄 메시아라고 기대했다. 기득권층과 로마 권력층은 예수를 위험한 선동자로 인식했고 그러므로 그런 예수의 언행을 항상 주시했다. 결국 예수가 종교적 의미의 죄인 취급을 받아 유대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기보다는, 군사, 정치적 범죄인 취급을 받아 침략자 로마법의 십자가형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이 또한 예수의 침략정권에 대한 '정치성'을 반영하는 간접적인 증거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 김지하가 70년대 민사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을 상기할 수 있다.

한편, 예수 자신이 의식한 스스로의 메시아관은 열렬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나 그 당시 묵시적 종교집단, 그 어느 그룹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도 유대사회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정치-사회문제에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기존의 정치질서와 종교적 규율을 위협한다는 혐의로 정치권력의 손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순전한 복음주의자'였고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였다면, 왜 그가 정치권력과 기존의 종교 기득권층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정치와는 무관한 인물인 예수가 '군중들에게 난동을 야기 시킬지도 모른다'고 정치권력 층에서는 우려할 수밖에 없었을까?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과 재야지도자 함석헌

유다와 예수와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1970-80년대 군부독재체제 아래서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과 재야지도자 함석헌(1901-1989)과의 미묘한 관계를 가정할 수 있다. 1970-80년대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들 중에선 군사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재야지도자 함석헌이나 문익환(1918-1994) 등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통해서라도 군부독재정권을 전복하고 민주정권을 세우기를 열망한 그룹이 있었다. 실제로 장준하(1918-75)는 박정권에 대항해 무력 게릴라전을 구상하기도 했었다. 이때 시국문제로 깊은 고민을 하는 한 의식 있는 운동권 대학생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그 대학생이 과연 누구의 주변을 맴돌겠는가? '3박자 구원'을 이야기하는 세계최대규모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주변보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감옥문을 들락날락하는 문익환 목사나 함석헌 주변을 맴돌지 않을까? 유다가 누구인가? 1970-8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표현하면 그는 시국문제로 고민하는 과격한 운동권 젊은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1970-8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표현하면 그는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아파하고 울부짖는 사회의 양심적 스승이 아닐까?

물론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의 기대와는 달리 비폭력을 주장하는 함석헌은 결코 군사독재체제에 대하여 무력투쟁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인이 아닌 그로서는 정권을 잡아야 하겠다는 야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당시의 로마식민정권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수의 언행을 항시 주목하고 경계했던 것처럼, 박정희 군사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재야의 함석헌 그룹이 행여나 정권타도나 정부전복을 계획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경계하고 주시했다.

70-80년대를 통해서 소위 정부비판을 하는 진보적 기독교인은 한국 전체기독교인 중에서는 소수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목할 것은 이 소수그룹의 기독교인을 통해서 당시의 가장 중요한 시국성명서들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박정희 정권은 이들 소수 그룹의 기독교인을 재야의 주요한 정치적 교섭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 반면에 군사정권은 '순수 복음주의'교회나 기득권층과 밀착해있는 극우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체제전복위협을 느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국문제를 풀기 위한 정치교섭상대로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혼돈스러운 그의 주변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선 자리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근본적 복음주의 기독교인그룹이나 아니면 독재체제전복에 열중해있는 운동권그룹 중 그 어느 그룹과도 달랐다. 예수의 선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순전한 복음주의자도 아니었고, 또한 로마식민정권의 체제전복에 열중해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함석헌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도 군사독재아래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함석헌은 자신이 역사적으로 속해있는 시대의 사회정치적 문제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함석헌은 종교인으로서 한국의 정치사회문제에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의 입장과 민주화를 위한 행동은 지극히 성서적이었고 아주 예수적이었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그의 예수관을 표현하기도 했다: " 예수는 정치하잔 목적은 아니었고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럼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나 하면 그렇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애끊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민중의 양심이 썩어버리는 일이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재야의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씨알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하는 씨알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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