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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북한생활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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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7-05-21 09:42 조회2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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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북한생활 2년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된 농사꾼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자리 잡은 자택으로 찾아 갔을 때에(7월 1일) 함석헌 옹은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열 평 남짓 뵈는 정원에 서 있는 함옹의 뒷모습에서 필자는 불현 듯「시골 할아버지」의 순박함을 느꼈다. 그러나 마주 앉은 두 시간 동안 흐트러뜨리지 않는 함옹의 정정한 목소리, 조리있는 말, 생생한 기억력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했다.
 
김성호: 함선생님을 뵙게 되니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주로 해방 직후 2년간 겪으셨던 북한 생활에 관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함선생님은 해방된 후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의 한 멤버이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맡으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함석헌: 교육부장이란 직책이었어요. 처음엔 용암포읍 자치위원장이랬는데, 조금 있으니까 군(용천군)에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으로, 그랬다가 9월 초로 기억되는데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자치위원회를 조직하니 군 대표를 뽑아 보내라는 통지가 와서 회의 끝에 나와 부위원장인 이용흡(李龍洽)이 갔었죠. 그래 관계하게 된 것이죠.
 
김성호: 용암포읍 자치위원장에 피선된 경위를 말씀해주시죵 ^
 
함석헌: 나야 자진해서 할라고 했나요. 해방이 되니까 용암포 시에 누구누구 하는 사람이 같이 축하식을 갖자고 해서 나간 게 아주 잡혀버린 것이죠.
 
해방이 되던 45년 8월 15일 함옹은 똥통을 메고 집 앞 채소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당시 함옹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동안 미결수 생활을 치루고 나온 뒤로 고향인 용암포에서 농사꾼으로 자처하고 또 농사꾼의 벗이 되려고 애쓰던 중 이었다.
이날 오후, 함옹의 생질 최창복(崔昌福)이 용암포에서 자전차를 몰고 (함옹의 집은 읍내에서 약30리 떨어져 있었다) 와서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36년 동안 잠에 깸에 그리던 그날이었건만 막상 듣고 보니 그저 벙벙, 흥분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메고 있던 거름통도 내려놓지 않고 그저『그래, 그날이 오긴 왔구나!』하는 마음뿐, 주던 거름을 마저 주려 했다. 생질은 용삼포의 여러 인사들이 같이 축하식을 갖잔다면서 읍내로 나와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함석헌: 그땐 하던 일을 어서 마치고 조용히 앉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고 싶었어요. 그래「나도 기쁘지 안 기쁘겠냐만은 축하를 해도 내 식으로 할 터이니 그대로 하시라고 해라」고 보내놓고는 거름 주던 일을 계속했죠. 좀 있었더니 생질이 다시 다녀와서는 여러 사람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꼭 나와야 한다고 하면서 모두 다 모여서 기다린다는 거야요. 그러니 그 이상 거절 할 수가 있어야죠.
 
咸옹은 자신의 이름에 장 자가 붙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읍내에 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어쨌거나 식을 주장했고 시가행진을 늦도록 했는데, 이때 물결치는 태극기를 보고는 열아홉 살 때 3.1운동 만세를 부르고는 27년 만에 처음으로 시원한 날을 보았다고 한다.
 
김성호: 함선생님은 고향에서 꽤나 유명인사이셨군요.
함석헌: 허허. 고향은 고향이로되 주로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 노릇을 했지, 집에 들어와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사실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엘 나가 보니까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야. 위원장인 이유필(李裕弼)씨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처음인데 아마 우리 지방에서 나를 내세운 건 내가 중립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해방이 돼서 정치적 공백이 생기니까 치안 유지를 위해 어디서나 자치위원회를 만들었는데, 누가 그것을 이끄느냐가 그들에겐 문제였단 말씀이야. 친일했던 사람이 안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사람이 나오면 천도교 측이 허락을 안하지, 천도교가 나오면 기독교가 허락 안하지, 이 런 관계여서 내가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라 해서 내세우지 않았나 생각돼요. 나도 그때 기독교 신자는 신자지만 그렇게 교회적인 사람은 아니었거든.
 
형무소만 밤낮 가는 사람
여기서 잠시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해방 당시까지 함옹이 살아온 내력을 살펴보자.
평안북도 용암포가 고향인 것으로 알려진 함옹의 본적은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이다. 한약방을 경영하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함옹은 향리에서 사립 덕일소학교를 다닌 뒤 양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3.1운동 때 학교를 자진해서 뛰쳐나오는데, 3학년이었으므로 졸업을 겨우 한해 앞둔 때였다.
 
함석헌: 그때 들어가기 어려운 관립 학교(平壤高普)를 만세 이후 남들은 거의 다 들어가 다녔지만, 내가 그만둔 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굳센 뜻이 있어서 한 것같이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야요. 차마 내 양심에, 어제는 있는 힘을 다해서 만세를 부르면서 배반하고 나왔던 그 권세 앞에 가서 잘못된 것이라고 부인할 수 없어서 그만 둔 거죠.
 
평양고보를 자진해서 그만둔 뒤 2년 간 집에서 이럭저럭 지내다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함옹은 뒤늦게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우등생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옹 은 남강 이승훈(李昇蒸)선생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관동 대지진으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하루 밤 지게 된 것은 건너간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함옹은 그곳에서 일본 명치 시대의 대 사상가이며 종교가인 우치무라(內村鑑三) 선생의 제자들인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양인성(楊仁性) 등 한국인 유학생 여섯명과 깊게 사귀면서 우치무라의 동경 집회에 자주 참석한다. 여기서 함옹은 기성 교회 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 어디서나 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뜻을 제단을 마련하기만 하면 그곳이 곧 교회가 된다는 무교회적 복음주의 신앙에 젖게 된다. 동경고사를 졸업한 해(1928년) 4월에 함옹은 귀국,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일본 동경에서 사권 교우 여섯 명과 발행하던 신앙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지를 계속 내고, 여기에다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집필·게재한 것도 오산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또『저 사람은 감옥에 가는 게 일이야』란 소리를 들을 만큼 사상 관계로 정주경찰서를 안방처럼 드나들었던 때도 이 당시다.
그러나 함옹이 경찰서와「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오산학교 교사 노릇을 그만둔 뒤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에 가서 농토학원을 맡았다가 이 학교 교장 김혁(金赫)의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1년간 수감 되었을 때부터이다. 함옹이 옥고를 치루는 동안, 부친 함형택(咸亨澤)씨가 돌아가시고 교우 김교신, 송두용 등이 대신 상주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 아무튼 함옹은 그 후로 해방될 때까지 고향에 돌아와 부친이 남긴 농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일에 몰두했다. 42년 5월에 성서조선사건으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살았던 경우를 빼놓고는 줄곧 농사일에 매달렸다.
 
함석헌: 내가 농사를 짓고 있었던 건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나고 일제의 감시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할 일이란 농사짓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농사꾼이 되려고 해도 사람들이 농사꾼으로 알아주질 않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읍내로 이발하러 나갔는데, 누구 하나 아는척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긴 돌아가는 말대로「경찰서 형무소살이만 밤낮 가는 사람」을 아는 척해서 좋은 일이 있었겠나.
 
김성호: 마음을 몰라주는 그런 사람들이 속살스럽지 않았습니까.
 
함석헌: 원망스럽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어요. 물론 혼자 마음은 늘 외로웠죠. 그래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땅을 파는 것이 내 일이려니 하고 살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에 용암포에서 축하식을 같이 하자고 나오라고 했을 때도, 이제 나가면 정치적인 급류에 말려들어 갈텐데 어찌할까, 혼자 꽤나 반문했어요. 그렇지만 나를 나오라는 것은 나를 이용하자는 것인데 이런 때엔 이용당해도 좋다, 모르고 당하면 어리석지만 알고 당하는 건 괜찮다, 하리만큼 해준 다음엔 나는 물러난다, 내가 정치를 아느냐는 맘먹고 나갔었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김성호: 교육부장으로 계시면서 주로 어떤 일올 하셨나 용
 
함석헌: 그 땐 누구든지 계획을 세워서 큰일 하기 보단 치안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위원장인 이유필 씨의 말을 빌면「우리는 치안을 유지해 가다가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국내에 돌아오면 고스란히 갖다가 바치면 된다」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정치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도 속으로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렇지만 어느 의미로는 그때의 일반의 기분을 잘 표시한 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더라도 함옹은 참 열심이라면 열심으로 일했다고 한다. 이왕이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번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함옹을 바쁘게 만든 셈이다.
 
김성호: 평소에 생각하셨다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함석헌: 주로 세 가지를 생각해 왔어요. 어릴 적부터 기독교요 민족주의적 신앙 속에서 자라났으니까 기독교 신앙이 하나 있어야 하고, 민족은 물론 생각해야하고, 또 농촌 중심으로 신생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한 것이죠.
 
김성호: 평북 자치위원회와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와는 관계가 있었습니까?
 
함석헌: 처음에는 연락 없이 했구요. 그랬다가 그해 10월인가 날짜는 모르겠고, 이북 5도 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평양에 나갔다가 왔죠. 그땐 김일성이 아직 나오기 전이죠.
함석헌옹이 고당 조만식 선생을 만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외로워 보였다고 함옹은 회상한다.
 
김성호: 평북 자치위원회에 좌익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참여했습니까? 아니면 민족진영뿐이었나요.
 
함석헌: 자치위원회는 7〜8개 부를 정부 모양으로 두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도 몇 사람 들어와 있었어요. 해방 직전까지 일본 동경에 유학한 사람으로서 좌익 사상을 가진 백용구(白容龜)란 사람이 부위원장으로 있었고, 학생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져 퇴학당한 사람이 몇이 있었죠. 그런데 그때 보면 순수한 공산주의자도 아니야. 순수가 어디 있었겠어요. 고약한 사람이 많았어요. 그중에 경찰 책임을 맡은 보안부장 한웅(韓雄)이란 사람은 참 악독한 사람이었어.
 
한웅이라고 하면 신의주사건 당시 고등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린 장본인이다. 그는 그 후 김일성에 의해 신의주사건 발생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좌익 인물이 참여하긴 했어도 그 수는 민족진영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대세는 자연 민족진영인 기독교인과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흘렀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녘 땅에 진주하면서「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뒤집히고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김성호: 신의주에 소련군이 들어온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함석헌: 기억을 잘 못하겠는데, 아마 9월 말쯤일꺼요.
 
김성호: 소련군을 맞은 위원회의 입장이랄까 분위기는 어땠나요.
함석헌: 소련군이 들어오던 날, 우리는 정무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각료회의랄까.자치위원 전원이 앉아서 회의를 하는 데, 갑자기 소련군이 시내로 들어온다고 전해주더군요. 그러니까 우스운 게, 환영을 나가야 한다면서 무슨 부장 무슨 부장 하는 것들이 서로 의논할 겨를도 없이 다 뛰쳐나가 버리고, 자리에는 이유필위원장과 나와 둘만이 건네다 보면서 웃고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말이야.
 
공산당도 내겐 뭐라고 못했지
소련군이 들어온 이후로 신의주시는 또다시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자치위원회에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의 이야기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해졌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소련군이 상점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고 여자 문제였다.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모두 한 수용소에 모으고 젊은 여자들만 골라 순번으로 소련 군인에게 보내기로 했는데, 일본 여자들도 그것을 승락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해방으로 인해 왔던 감격,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협력하고 일하려던 그「열심」은 다 달아나 버리고 남은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걸국 함옹은 더 있고픈 마음이 없어 어느 날 위원장에게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한다.
 
함석헌: 그랬더니 이유필 영감이 내 손을 잡으면서「그만 두더라도 같이 그만 둡시다. 일이란 건 시기가 있지 않소」하더군요. 말을 듣고 보니 영감이 참 불쌍해요. 그 지방에서는 제일 인망이 있다고 추대해놓고, 거기다 대고 배반하는 격이지. 나도「모르겠소」하고 갈 수가 없더군요. 그래 그만둘 생각을 누르고 하루 하루를 지냈죠. 공산당놈들도 내게 정면으로 뭐라고 하지는 못하더군요. 사상적으로 원수로 알 것이야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품지 않은 건 저희도 그렇고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게야요.
 
김성호: 당시 소련군의 행패는 그들이 무식했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소련군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함석헌: 소련 사람은 형편없어. 소련도 일반 민중의 정도가 낮은 것 같아. 지식 정도는 물론이지만 도덕 정도, 교양 정도가 낮은 게 근본 문제야, 또 말과 행동이 달라. 소련군이 들어오더니 시민들을 모아놓고 사령관인가 하는 사람이 연설을 하는데, 「우리는 여러분이 어떤 형태의 정부를 조직하든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해라」고 말하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은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는 소련 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김성호: 소련 주둔군과 평북 자치위원회 간에 마찰 같은 건 없었나요. 거북한 입장이 된 것이라도….
함석헌: 신의주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소련군 교육고문이 날 찾아 오더군요. 우리나라 2세가 통역을 하는데, 나보고「앞으로 무슨 주의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냐」고 물으면서 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 나는 일제시대 때부터 내 생각대로 학생들을 직접 정치에 관계를 안 시킬련다고 했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학생이 정치를 모르고 되겠소?」하더군요. 물론 모르면 안 되지만 적어도 직접 정치 활동에 관계하지 않도록 한다고 그랬죠. 그 말이 아주 못마땅하게 들린 모양이야요.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김성호: 최용건(崔鏞健)과도 만나셨다면서요.
함석헌: 5도 연합회의 전인지 후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오산 동창 몇이 모여 신의주에 온 최용건일 만났죠. 그는 나와 같은 용천 출신이고, 오산학교에서도 한 반에 있어서 잘 알아요. 학교에서 스트라익을 하고 나가서는 중국에 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안군에 있었다고 하던데, 알 수가 있어야지요. 자기 말대로 독립군 노릇을 했는지, 아니면 마적질을 했는지. 하여간 신의주에 왔는데, 만나보고 아주 실망했어요. 나라를 떠나 몇 십 년만에 돌아온 사람으로서 정말 나라를 위할 생각이 있다면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할 수 없었을 거에요. 우리가 청하기 전에 제가 먼저 우리를 찾았어야 했을 거에요. 그런데 모처럼 환영한다고 만났는데, 한 마디 말이 없어요. 오산학교에 있을 때 지나간 것으로 보아 첨부터 그리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말이 전혀 없어요. 그때 벌써 난 믿지 못할 사람으로 단정해 버렸죠.
 
우리청년회의 고문(顧問)
김성호: 신의주 학생의거로 넘어가죠. 일반인은 함선생님이 이 사건에 직접 관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함석헌: 그렇지는 않아요. 당시 도의 문교 책임자였으니까 직접적으로 낄 수는 없었죠. 45년 11월 22일, 그러니까 사건 전날 어디서 보고가 들어오는데, 시내에 있는 고교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자치위원회와 공산당 본부엘 들어오려 한다는 거에요.
그래 곧 각 학교 교장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그렇게 하면 큰일이 날테니 타일러서 미리 막도록 하라고 했죠. 그건 공산당의 속아지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학생들이 절대로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해서 죽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어떤 큰 사건이든 도화선은 있게 마련이다. 4.19가 마산 사건으로 터졌다면 신의주 학생의거에 앞서 간 것은「용암포 사건」이다. 용암포 사건을 이야기하려면「우리청년회」를 떼놓을 수 없다.
 
김성호:「우리 청년회」와 함선생님과는 특별한 관계였습니까?
함석헌: 우리청년회는 대학 교육을 받은 신의주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인데, 사회적으로 많이 활동했죠. 내가 문교부장이니까 회를 조직하면서 나를 찾아와 회장이 돼달라고 합디다. 나는「당신들의 활동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그것만은 못 한다. 직접 회장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못하니, 직접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응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했죠. 그래 고문격으로 있으면서 이따금씩 나가 얘기를 해주곤 했어요.
 
우리청년회라고 하면 당시 신의주, 아니 평안북도의 인텔리 정예분자들이 모인 단체였다. 민족진영의 젊은 지성인 30여명이 김성순(金聖淳),조동영(趙東瀯),백유철(白猶哲) 등을 중심으로 뭉쳐 ‘우리 靑年’이란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공산당의 횡포와 불법행위를 지탄하는데 필봉과 행동으로 앞장선 단체였다. 우리청년회는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자 공산당에 의해 그 「배후 조종자」로 몰려 야만적이고 잔악한 보복행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김성호: 평북 사람들, 특히 용천 사람들의 기질과 신의주 사건과는 연관이 있다고 보십니까?
함석헌: 평안북도가 다 그렇지만 용천은 아주 부유한 고을입니다. 땅이 평평하고 기름져서 전국에서 유수한 쌀 고장이에요. 큰 부자는 없지만 자작농이 많아요. 남쪽같이 소작농이 있어 대립된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민주주의적 조건이 좋게 됐다고 하면 아주 좋게 됐죠. 기독교인도 아주 많아요. 전국에서 한 고을치고 기독교인이 제일 많은 곳이라면 용천입니다. 용천 고을 하나가지고「노회」가 조직돼요. 내가 알기로는 용천군 안에 62〜63개 이상의 교회가 있어요.
 
「노회」라고 하면 기독교에서 총회 다음가는 교회 조직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노회가 현재11개 있는 것을 참고하면 함옹의 고향에서 기독교세가 얼마나 왕성한가는 짐작할 수 있다.
 
함석헌: 그런데서 자라난 아이들이 가정적으로 사상적으로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를 안 좋아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김성호: 함선생님은 용암포 사건 당시에 신의주에 계셨죠.
함석헌: 그렇지요. 그래서 자세한 것을 잘 몰라요. 하지만 내 뒤를 이어 군 자치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의 횡포 때문이란 것은 알고 있어요. 그는 독일 유학도 했다고 하는데 별로 지식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소련군이 들어온 후부터 군 자치위원장으로서 마땅치 않은 일을 많이 해서 민중의 원망을 샀는데, 그것이 쌓여 가다가 분개한 학생들이 데모인가 무슨 비슷한 일이 있었대요.
 
김성호: 용암포 사건 소식을 듣고 무척 놀라셨겠습니다.
함석헌: 민중이란 약하다면 참 약한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때마침 생질이 신의주엘 왔길래 물었죠.「그래도 우리 마을 사람들이야 안그랬겠지? 했더니「웬걸요. 우리 동리 사람들이 한층 더한 걸요」해요. 듣고는 참 슬펐어요. 자랑을 하자고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브루조아 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라, 해방될 때까지 나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그들을 대하느라 했고 그들도 나를 믿는다고 생각 했는데….
 
다섯번째의 옥살이「쉰날」
용암포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는 신성해야 할 학원 내에까지 공산당이 침투하여 평북에서 유일한 수산기술학교를 폐쇄하고 공산당 정치훈련소로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신의주 학생의거의 불씨가 일제 때 쓰던 법원(재판소)을 공산당이 자치위원회에 청원이나 교섭없이 하룻밤새에 공산당 본부로 만들어 버린 것과 너무나 홉사하다.
 
김성호: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이 일어난 그 날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함석헌: 11월 22일 정오쯤 되니까 총소리가 나더군요. 정문엘 나가보니 벌써 총에 맞아 학생 셋이 쓰러져 있어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무서워서 손을 댈라고 안해요. 그래 하는 수 없이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 부원들을 데리고 나왔죠. 나가보니 둘은 숨이 끊어졌고 하나는 숨기걸이 있었는데 가망이 있어 뵈지 않아. 그래도 안아서 도립병원엘 갔죠. 돌아오니까 도청 (당시 자치위원회는 일제시대의 도청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문에서 공산당원인 듯 보이는 한 사람이 오더니만「이것만이 아니요. 더 큰 델 볼라우. 갑시다」하대요. 그래 간 게 공산당 본부였어요. 거기엔 기관총에 맞아서 쓰러져 넘어진 게 세어볼 새도 없지만 수십 명이 그냥 깔려 있는 거야요. 뜰에는 소련 군인이 꽉 차있고. 조금 있으니까 며칠 전에 교육부로 왔던 소련군 고문이 일어나서 연설해요. 러시아말을 모르니까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손가락질 하면서 애기하는 게, 내가 바로 사건의 장본인이라는 거지. 그 소리를 듣더니 총구멍이 일시에 싹 하고 내 가슴으로 모여 들더군. 나는 가만히 서 있었죠. 별 것 있어요. 그러자 한 러시아 장교가 다가오더니 그 총구멍을 흩어지게 하더군요. 그러나 소용이 없었어요. 또 몰려 와요.
 
총검이 밀려들었다 떠밀렸다, 쫓겨 갔다가 밀려들었다가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으면서도 함옹은 조금도 겁이 안났다.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도 똑똑했다. 총구멍들이 방사선 모양으로 가슴에 와 닿을 때도 함옹은 분하다는 생각도, 그들이 밉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나님이란 생각, 믿는다는 생각, 옳은 도리라는 생각, 평생에 배우고 지켜온 것이 내 속에 살아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사람은 사람답게 살 때도 죽을 때도 있는 거다. 죽을지라도 사람답게 죽어야지 비겁하게 해선 못 쓴다」는 마음뿐이었다.
 
함석헌: 소련 장교가 겨우 군인들을 정리시켜 놓으니까 이번은 우리나라 공산당원들이 뭇매질을 시작하는 거야. 매 맞은 기억은 있어요. 서서 맞은 기억 말이요. 한참동안 그렇게 서서 맞았죠. 옷이 찢겨지고 아픈 감각도 없어요. 그저 터덕터덕 몸에 와 닿는 것을 알 뿐이지. 아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마지막 순간에 여기(뒷통수)를 치는데 의식이 없어지는 걸 알겠더군요. 까무러치는구나, 이젠 마지막이다 하고 말이요.
 
얼마 후 정신이 든 함옹은 자신이 여러 사람에 들리어 방으로 옮겨지고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렴풋하게나마 빙 둘러선 사람들 중에 낯익은 얼굴도 한 둘이 보였다.
 
김성호: 다치신 데는 없었습니까.
함석헌: 별로 상한 데는 없더군요.
 
이어 함옹은 시내에서 한 오리길 떨어진 비행장으로 끌려가 그곳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해가 저물 무렵, 다시 끌려 나와 영문도 모른 채 철도호텔로 갔다. 당시 신의주에서 그런대로 좋은 집이라곤 철도호텔 하나밖에 없었는데, 소련군 주둔사령관이 머물고 있었다. 함옹이 들어선 방엔 소련군 사령관과 장교 한사람, 그리고 자치위원장 이유필이 나란히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석헌: 가만히 형편을 보니까, 이유필 영감이 강경한 태도로 항의해야 내가 풀려 나오겠는데, 말씀을 별로 하시는 게 없거든. 그럭저럭 대화 없이 시간이 지났지. 저녁식사가 나왔는데, 난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그랬고. 잠시 후 위원장 영감은 돌아가고 나는 끌려 일제 때 도 경찰부 유치장으로 쓰던 델 들어가서 꼬박 50일을 있었지.
 
50일의 옥살이. 이로써 함옹은 다섯 번째 옥살이를 기록한다. 첫 번은 1923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끌려가 하룻밤 자고 나온 것이고, 둘째 번은 오산학교에서 30년 남강 선생이 돌아가신 후 난데없는 ML당사건의 연루자로 정주경찰서에서 한 주일 있었다. 셋째 번은 40년 평양 송산농사학원에 있을 때 계우회 사건에 걸려 대동경찰서에 1년 있었던 일이며, 넷째 번은 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네 차례 동안 터득한 경험에 함옹은 어느 정도 덕을 봤다며 웃는다.
 
함석헌: 심문조서를 꾸미는데 내가 머리를 썼지. 심문은 소련 장교가 했는데 이 사람들은 풍속이 다르니까 이러구 저러구 설명이 소용없다, 인정에 호소해도 아무것도 없을 테고. 그저 물적 증거만 없으면, 딱 잡아떼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은 미리 생각을 하고 대답을 했어요. 그 효과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김일성이 막 나서려 하는 때이므로 민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해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50일이 지나고 나가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평양에서 구명 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디다.
 
김성호: 50일 간 구류 당하신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함석헌: 모르지요. 죄목을 말해주나요. 몇 차례 조사는 받았지만 다 잊어버리고 모르겠어. 그런데 심문하는 게 가관이야. 말이 통해야 심문을 하지. 그 당시 신의주엔 러시아말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없었나 봐요. 통역을 누가 하는고 하니, 일본 갈보가 한단 말이야. 하르빈에서 데리고 온 일본 여자들인데, 내가 일본말을 한다고 하니까 통역을 하대. 그 갈보가 얼마나 무식한지 역사 지리해도「역사란 게 뭐요 지리라는 게 뭐요」물을 정도로 무식해. 그러니 거기다가 내 운명을 맡기고 심문당하는 내 신세가 우습지 않아?
 
김성호: 혹시 고문은 안 당하셨습니까?
함석헌: 거기서는 고문 같은 것은 일체 없고 그저 구금만 당하고 있었어요. 그때 내 나이 마흔 다섯이었으니까…. 주로 책을 읽었지요.
 
스파이질 강요에 월남
김성호: 「쉰날」이란 시집이 바로 그 당시 쓴 시를 모아 내신 것이던가요.
함석헌: 시랄 것까지 있나요. 평생에 시라는 것을 써본 일이 없다가 이름이나마 시라고 해서 쓴 거죠. 사실 그 글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어요. 내 어머니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당신도 얼마나 심한가를 알아본다고 겨울밤 밖에 나가 새워보곤 하셨던 분이에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된 걸 보고 그 마음이 어떠할까 싶어 어머니 생각, 나라 생각에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느낌을 썼죠. 훗날 나와 보니 휴지조각에 몇 수씩 적어 내보낸 글이 고대로 정서가 되어 책으로 매어져 있더군요. 사람들이 곧 인쇄를 하자면서 나한테 제목을 묻길래「쉰날」이라고 했죠.
 
함옹은 그 제목을 이렇게 풀이한다. 감옥에 있는 날 수가 쉰 이니「쉰날」이요, 격에도 맞지 않는 정치를 한다고 나섰다가 잡혀가 썩고 썩다가 왔으니「쉰날」이요, 그동안 혼은 평안히 쉬었으니 또「쉰날」이라는 것이다.
 
김성호: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만, 아까 우리청년회에 고문격으로 계셨다고 했는데, 우리청년회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함석헌: 새로 오는 새 역사의 부름에 대해 일어나는 자각운동 혹은 행동의 첫걸음이었다고 봐요. 가족은 운명을 같이하는 단체지만 가족끼리는 의식적인 단결은 없어요. 의식적인 단결은 도리어 그 가족을 멸망시키는 좀도둑편에서 먼저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의 단체가 생기면 가족도 의식적으로 단결해서 부서를 짜고 활동해야만 그 도둑의 단체를 이길 수 있지요.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상적인 계급이야요. 계급적 대립이 별로 없었던 이북에서, 그중에서도 평안북도는 그래요. 그런데 공산군대가 들어오고 권력에 대해 야심 있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된다 이겁니다. 사회 양심이 멍청하게 있을 수 있겠어요. 사회의 안전한 발전을 위협하는 그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안돼요.
 
신의주 혁명의거 사건에 대해서 함옹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물어 봤다.
 
함석헌: 당시의 젊은 학생들로서는 당연한 반항이죠. 공산당의 행패를 차마 볼 수 없으니까 격분해서 그런 거죠. 다른 복잡한 것은 있을 리가 없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함옹은 용암포 집에 내려가 농사짓던 일을 1년 남짓 계속한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46년12월 24일 함옹은 난데없이 나타난 보안대원에 의 해 끌려가 도 경찰부 유치장이 아닌 다른 감옥에서 한 달을 또 보낸다. 함옹은 이때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다만 정주에서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풍문만 들었다고 한다.
 
함석헌: 한 달 후 내보내주면서 한 주일에 한 번씩 고향 보안서에 나오라는 거에요. 첨에는 멋모르고 갔더니 마을에 무슨 일이 없냐고 묻더군요. 별일 없다고 했죠. 있으면 있다고 그러겠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당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충실한 공산주의자냐. 어째서 보고할게 하나도 없단 말이요」고 화를 내더군요. 그건 차마 그렇다고 할 수가 없대. 그래 내가 아는 한엔 특별 건이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죠. 그 다음에 가니까 이유필 위원장 후임으로 들어온 백영엽(白永燁) 목사의 뒤를 조사해서 보고 하라고 지시해요. 스파이질 하라는 거죠. 그건 죽으면 죽었지 못 하겠다,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해서 남쪽으로 내려 왔죠. 친구들도 내려가라고 권했고.
 
김성호: 단신 월남이셨나요.
함석헌: 물론 혼자죠. 가족들은 그 후 넘어 왔구요. 난 47년 2월 고향을 떠났는데 평양에 와서 기회를 보느라고 2주일쯤 있다가 해주로 청단으로 해서 넘어 왔죠. 안내하는 사람이 있어서 걸어서 무사히 넘어 왔어요.
 
함석헌 옹을 특징짓게 하는 흰 턱수염은 바로 월남하는 동안 자란 수염을 깎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데서 비롯된 것.
 
김성호: 바로 어제 KBS에서 특별생방송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방영 했는데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함선생님도 이산가족이시죠.
함석헌: 큰 아들(國用) 부부와 애 둘, 그리고 큰딸(銀秀)네가, 이북에 있어요. 풍문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내 아들은 벌써 죽었다고 하고…. 내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생도 죽었다고 해요. 큰 아들네 큰 애기는 42년생이니까 마흔 둘쯤 됐을 거고, 둘째가 해방되던 해에 났으니까 지금은 서른여덟인가 아홉인가….
 
이 대목에서 함옹은 목을 좌우로 흔들며 심한 도리질을 친다. 가슴에 맺힌 매듭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풀어지기 쉽지 않은 매듭을 풀려 애써 온 지난날이 안타까워서일까.
그런 함옹에게 필자는 인터뷰를 얼른 마무리짓기 위해 해방 직후 2년 동안 북한에 살았던 체험을 토대로 해방과 신의주 학생의거, 그리고 남북 분단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함옹은 어떻게 내리고 있는가를 알아봤다. 이 물음에 대해 함옹은 사상·정치·교육·종교·사회상 등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덧붙였는데 너무 길어 결론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함석헌: 해방 후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사람 노릇도 못하던 지난날을 다 잊어버리고 새 기분에 감격해서, 우리나라도 이제 바로 됐다고 했는데. 서로 제가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나라를 못 쓰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했다면 잘됐을 겁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훈련을 옳게 받을 수가 없었어요. 새 시대가 와도 적응할 마음의 준비가 없어요. 이제라도 학교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민족으로 이렇다 하는 생각을 가르쳐야 돼요.
 
8.15 해방과 북한생활 2년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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